일본 대마도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는 대마도 역사를 탐방하면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 중 하나이다. 고종의 딸로 태어나 1931년 5월 대마도주 종무지(宗武志:소다케유키)와 신문화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결혼케 된 옹주의 결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마도내 거주하는 한인들이 세운 것으로 ‘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봉축 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에 약 2만명의 동포들이 대마도로 끌려가서 숯굽는일, 군사시설 건설 등의 강제 노역을 당한 우리 동포들이 옹주의 대마도 방문을 환영하기 위하여 십시알반으로 돈을 모아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를 서기 1931년 10월 팔번궁신사 경내에 건립했다. 서기 1955년 6월 종무지와 덕혜옹주가 이혼을 한 후 대마도 인들은 야박하게 비를뽑아, 금석성 풀밭에 내동댕이쳤다. 지금 서있는 비는 서기 1999년 7월 14일 부터 부산 대마도 직항 선박의 취항으로 한국관광객이 모여들자 방치해 둔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부족한 관광객에게 볼거리 하나 더 제공하여 돈벌이를 해야겠다는 목적으로 서기 2001년 11월 10일 되 세운것이다.
덕혜옹주는 1912년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때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을 통해 얻은 외동딸이다. 그는 어린시절 영친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고 쓸쓸해하던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천진난만하게 지냈다. 옹주 나이 7세때 고종이 승하하자 후손이 없던 순종은 옹주를 친딸처럼 돌봤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13세되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로 일본에 건너가며 비극을 맞게 됐다. 이역만리 낯선 생활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옹주는 신경쇠약증세를 나타냈으며 17세때엔 생모 양귀인이 숨진 충격으로 증세가 심해져 조발성치매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병세가 약간 호전되자 일본은 19세된 옹주를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종무지백작과 결혼시켰고, 유일한 소생인 딸 (종정혜)을 얻었으나 지병은 도져만 갔다. 계속된 병상생활 끝에 53년 종백작과 이혼했고 단 하나의 혈육 정혜마저 결혼에 실패한 뒤 현해탄에 현해탄에 몸을 던짐으로써 옹주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해방후 고국에 돌아오려 하지만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50세가 된 이날에야 겨우 귀국한다.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몸으로 돌아온 그는 고독하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다 89년 4월 77세 나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2016.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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