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길 - 일본 대마도 통신사황윤길현창비
통신사 황윤길 현창비는 2011.12.3. 한국대표 황수영박사와 대마도 대표 영유구혜(永留久惠)가 주축이 되어 설립하였다. 황윤길은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61년(명종 16)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을 거쳐 1567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황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병조참판을 지냈다. 1590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선임되어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수행원 등 2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로 가서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豊臣秀吉) 등을 만나보고 이듬해 봄에 환국하여, 국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황윤길은 1590년 통신사로 대마도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만나는 등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임금께 일본의 침략을 예견, 대비책을 강구할 것을 보고하였으나 부사로 갔던 김성일(동인)이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과는 반대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인물이 보잘 것 없고 침략기미도 없다고 보고함으로서 방비책을 미처 통일치 못한 상태로 1592년 임진왜란을 당했던 것이다. 서인에 속한 그가 일본의 내침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나, 동인에 속한 김성일이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여 일본방비책에 통일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당시 그의 말을 좇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한다. 한편, 그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鳥銃) 두 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바쳤지만, 조정에서 그것을 실용화할 계획을 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선조 23년(1590) 조선에서 통신사 파견시 正使로서 副使 金誠一, 書狀官 許筬과 함께 수행원 2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로 가서 관백(關伯) 도요토미(豊臣秀吉) 등을 만나보며 정세를 살피고 이듬해 봄에 돌아와 국왕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일본의 내침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나 東人에 속한 副使 金誠一은 西人에 속한 正使 黃允吉에 반대하여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준비가 없었다고 상반되게 말하여 일본방비책을 통일하지 못하였다.(중략) 이렇듯 당파싸움으로 인한 국정의 파탄을 교훈삼고 御前에서 국왕에게 直諫하며 무기까지 준비하였던 黃公의 애국충절을 길이 현창하고자 이 비를 세우다.
▲통신사황윤길현창비
▲통신사황윤길현창비
▲통신사황윤길현창비
▲통신사황윤길현창비
<2016.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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