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한남문화권

여주 혜목산 고달사터

蔥叟 2015. 12. 10. 07:22

여주 혜목산 고달사터

 

고달사는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 부르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인 764년(경덕왕 23)에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유물을 통하여 신라 하대에 창건되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큰 도량으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중심 법당자리에 4각형의 큼직한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가 있어 이 불좌대를 중심으로 남향한 넓은 도량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뒤편으로는 낮은 산 능선에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가 있고, 그 밑으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이 있으며 그 남쪽의 법당지 뒤편에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및 이수(보물 제6호)가 위치해 있는데, 이들 석조물은 모두 고려 초기의 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신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869년(경문왕 9)에 출생하여 958년(광종 9) 8월에 90세로 입적한 당시의 고승이었다. 그의 혜진탑은 977년(경종 2)에 건조하였으며, 이 탑비는 2년 앞선 975년에 건립하였다. 따라서 이 석조물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석조물의 건조연대의 추정은 물론 고달사지의 연혁도 짐작할 수 있다. 산 능선에 위치한 고달사지부도가 누구의 부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정제된 조형과 세련된 조각 수법에서 장중함을 엿볼 수 있다. 신라 하대 이래로 나타나는 중대석의 귀두부와 운룡문, 연화문이나 탑신부의 조각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우수한 작품이며,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이미 큰 도량으로 번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불좌는 물론 주변 금당유구에서 볼 수 있는 주춧돌들이 모두 원좌의 기둥굄이 정연함을 볼 때, 역시 10세기를 전후한 때의 거대한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고달사 석조물은 모두 고달이란 석공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불사를 끝내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었으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실로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으로 추정되며 절 부근에 큰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 광활한 사역에는 유물만 남아 있다.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고달사터

 

 

 

<2015.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