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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을 찾아서 - 강진 사의재

蔥叟 2015. 6. 16. 05:26

다산을 찾아서 - 강진 사의재

 

사의재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머물며 글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대역죄를 짓고 귀양 온 선비에게 겁을 먹고 앞 다투어 달아날 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다산은 가족에게 띄운 편지에 “사람들은 나를 역병에 걸린 환자를 보듯 피했다”고 썼다. 심지어 백성들이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기 까지 했다. 그런 다산에게 거처를 내 준 이가 동문 앞에서 술과 밥을 팔던 주막의 주모였다. 그녀의 보살핌 속에서 다산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강진읍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은 다산은 그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라는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사의재는 자신이 거처하던 방에 다산이 붙인 이름이고 주막의 이름은 ‘東門賣飯家’였다. 다산은 주모가 끓여주는 아욱국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사의재

 

▲사의재

 

모두가 외면할 때 방을 내주고 밥을 끓여낸 주모는 다산이 심신을 추스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다산은 유배 초기 정신적 충격으로 석 달이나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날마다 우두커니 앉아있는 그에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보라고 권한 사람도 주모였다. 주모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산이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사의재

 

▲사의재

 

『어느 날 저녁 주인 노파가 제 곁에서 閑談을 나누다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令께서는 글을 읽었으니 이 뜻을 아시는지요? 부모의 은혜는 다 같은데 어찌 아버지만 소중히 여기게 하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기는지요. 아버지 성씨를 따르게 하고, 상복도 어머니는 낮출 뿐 아니라 친족도 아버지 쪽은 일가를 이루게 하면서 어머니 쪽은 안중에 두지 않으니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제가 노파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준 시초라 하였소. 어머니 은혜가 깊기는 하나 하늘이 만물을 내는 것과 같은 큰 은혜를 더 소중하게 여긴 때문인 것 같소.” 그랬더니 노파가 말했습니다. “영공의 대답은 흡족하지 않습니다. 내 그 뜻을 짚어보니 풀과 나무에 비교하면 아버지는 종자요, 어머니는 토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자를 땅에 뿌리면 지극히 보잘 것 없지만 토양이 길러내는 그 공은 매우 큽니다.(하략)” 저는 이에 뜻밖에도 저도 모르게 크게 깨달았고, 삼가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천지간의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미묘한 의미를 바로 밥파는 노파가 말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매우 기이하고도 기이합니다.

 

▲사의재 편액

 

▲사의재 돌담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는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2007년에 강진군에서 옛터를 복원하였다. 초가집 두 채가 약간 비켜서서 마주보고 있다. 주막으로 쓰던 안채와 다산이 머물렀다는 바깥채가 그것이다. 다산의 사의재기는 다음과 같다.

 

사의재(四宜齋)는 내가 강진(康津)에 귀양 갔을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깨끗해야 한다. 깨끗하지 않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한다. 모습은 마땅히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르지 않으면 그것을 빨리 바르게 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한다. 적지 않으면 빨리 그쳐야 한다. 행동은 마땅히 무거워야 한다. 무겁지 않으면 빨리 늦추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四宜齋)’라고 하였다. 마땅하다[]라는 것은 바르다[]는 뜻이니, 바름으로 조절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이가 들면서 슬프게도 뜻한 일(공부)이 무너져 버렸으니 스스로 반성할 뿐이다. 때는 가경 8(1803) 겨울 11월 신축일(초열흘) 동짓날로 갑자년(180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 <건괘>를 읽었다.

 

四宜齋者余康津謫居之室也思宜澹其有不澹尙亟澄之貌宜莊其有不莊尙亟凝之言宜訒其有不訒尙亟止之動宜重其有不重尙亟遲之於是乎名其室曰四宜之齋宜也者義也義以制之也念年齡之遒邁悼志業之頹廢冀以自省也時嘉慶八年冬十一月辛丑初十日日南至之日寔唯甲子歲之攸起也是日讀乾卦

 

▲우물

 

▲우물

 

주막에서 4년을 지낸 다산은 강진읍 고성사에 있는 寶恩山房에서 1년 가까이,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2년 가까이 머문다. 1808년 봄에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가 해제된 1818년까지 10여년을 보낸다.

 

나는 가경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 주막집에 우거하였다. 을축년(1805) 겨울에는 寶恩山房(高聲寺)에서 기식하였고, 병인년(1806) 가을에는 鶴來()의 집에 이사가 있다가, 무진년(1808) 봄에야 다산에서 살았으니 통계하여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였다. 처음 왔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편안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산신계> 중에서

 

▲우물

 

▲동문매반가 현판

 

 

 

<2015.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