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산길 - 경주 남산 부처골 감실마애여래좌상
부처골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300여m 정도 올라가면 산허리를 따라 펼쳐진 자연암반 가운데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등신대에 가까운 불좌상을 안치하였다. 이 불상은 석굴사원(石窟寺院) 조성이라는 신라인들의 염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동지가 가까워지면 우리들을 반겨주시는 부처님이시다.
▲감실마애여래좌상
▲감실마애여래좌상
얼굴은 고부조로 조각하였으며, 신체와 대좌는 상대적으로 저부조로 새겨 서로 조각기법을 달리하고 있다. 낮은 육계가 솟아 있는 큰 머리, 초생달 같은 눈썹, 지그시 내려감은 눈, 도톰한 입술과 뺨 등은 다소곳이 숙인 둥근 얼굴과 어울리게 선각(線刻)없이 부드럽게 조각하였다. 목에 삼도는 없으며, 각진 어깨는 얿게 결가부좌한 다리와 함께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신체 굴곡은 거의 표현하지 않았으며, 통견의 법의는 두 팔 위로 흘러내려 양 무릎을 감싼 뒤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두 손은 소맷자락 안에서 서로 맞잡은 공수(拱手) 자세인 듯하나 정확한 수인은 알 수 없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불상은 감실 송에서 절대로 일어설 것 같지 않은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위는 높이 280cm, 너비 350cm, 깊이 90cm로 그 규모가 작아 흔히 감실이라 불리우며,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양식으로 보고 있으며, 얼굴, 대좌 등 세부표현에서 제작시기는 대체로 7세기 중반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의하면 머리에 나발(螺髮) 대신 주흑색(朱黑色)을 칠하고, 오른쪽 어깨와 소매 등에도 붉은 색 흔적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이러한 흔적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감실마애여래좌상
▲감실마애여래좌상
감실석조여래좌상의 삼국시대적 특징을 보면 첫째, 손을 옷소매 속에 넣고 조각의 선이 딱딱하고 보살형에 가깝다. 둘째, 옷자락이 대좌를 덮은 상현좌를 하고 있다. 셋째로 얼굴을 숙인 모습이다. 넷째로 조각에 각져 있어 부드러움을 느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입가에 보조개가 표현되어 있어 고졸(古拙)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통일 후의 불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삼국시대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불교는 한국화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신라시대 이래로 불상이 우리의 얼굴을 닮았다. 석가모니는 인도인이었지만 불상은 우리의 얼굴이며 건축물도 우리화 하는데 성공한 것 같다. 그에 비하여 기독교는 포교 당시에는 한옥에서 예배를 했지만 지금은 서양건축인 고딕식 건물에서 예배를 한다. 또한 교회에 걸린 예수의 상이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닌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가 전파되면서 토착신을 받아들였지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그렇지 못한데서 온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즉 낮선 건물에서 설법 시에는 목자 운운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김용옥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종교의 자기화를 역설하면서 흑인 예수, 백인 예수가 나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다른 신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속성인 걸 어떻게 할 것인가.
▲감실마애여래좌상
▲감실마애여래좌상
종교에서 탑이나 불상 등과 같이 조형물을 만드는 기본 이유는 근기가 낮은 백성들에게 시각전인 자료를 통하여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하는데 있는 것이다. 감실 불상은 너무나 우리의 아주머니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신라문화의 끊임없이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신라화 시키는 위대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군위 삼존석불은 중국인의 모습이며 기림사 건칠보살좌상은 원나라 사람의 모습인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감실 부처님의 조각은 딱딱한 느낌을 주는데 기마민족인 북위시대에 조성된 돈황의 조각이 이 이와 같이 딱딱한 느낌을 준다. 우리 나라에서는 석굴암 이전의 조각에는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아 미소가 남아있지만 석굴암 불상에 이르러서는 이상적인 모습을 조각하여 미소가 있는 듯 없는 형상을 하고 있다. 간다라미술은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에 그리스 조각을 흉내내면서 만들어진 불상으로 동서양 미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감실마애여래좌상
▲감실마애여래좌상
감실(龕室)은 원래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나 중국에서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석굴을 조성하지 않아도 자연환경상 아무런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석굴사원을 조성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있어왔다.
동굴은 모든 종교의 초창기 종교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그 대부분은 아직 정식의 예배시설이 없었던 시절의 임시방편이지만, 유독 불교에서는 석굴사원이라는 정식의 유형이 생겼고, 특히 인도에서는 최고의 예배공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무더운 지방인 인도에서 석굴이란 서늘하고 어두운 최상의 종교적 공간을 제공했다. 인도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꾸준히 석굴사원이 조성되어, 특히 서부 테칸고원을 중심으로 1,000여개소의 석굴이 조성되었다.
▲감실마애여래좌상
▲감실마애여래좌상
이상적인 종교공간으로 석굴이 각광을 받자 불교의 전파지를 중심으로 많은 석굴사원이 조성되었는데 서역과 중국의 실크로드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 돈황, 용문, 운강의 석굴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석굴사원의 최종 종착지가 바로 신라의 경주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사임질의 바위가 아니라 단단한 화강암으로 바위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석굴사원을 조성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하였다. 하지만 석굴사원에 조성에 대한 욕망은 1,000여년이 지난 후에도 식을 줄 몰라 신라에서도 석굴사원의 시초 양식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감실 석불과 같은 양식의 석굴사원이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문화의 생명력은 끈질긴 것이다.
한편 이 부처님은 다소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보통의 남성 부처님상과는 전혀 다르게 자연스럽고 살아있는듯한 한국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점에 주목하며 이 부처님은 신라 선덕여왕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흥미를 끈다.
즉 6세기 중반 이후 동북아시아에서는 왕즉불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고, 왕즉불 사상은 불교신앙을 지배자의 권위를 신성화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진평왕 후반 이래 덕만공주의 왕위계승 가능성에 대한 염려와 반발을 잠재우려는 의도에서 감실불상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하지만 불교국가에서 여래의 얼굴을 조각하면서 남자가 아닌 여자의 얼굴을 모델로 한 작품은 없다는 반론도 있어 속단하기는 어렵다.
<박홍국, 신라의 마음 경주남산>
▲감실마애여래좌상
<201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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