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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봄 - 경주 황룡사 금당터

蔥叟 2014. 4. 27. 05:27

서라벌의 봄 - 경주 황룡사 금당터

 

황룡사 구층목탑터의 북쪽에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금당이 있었다. 금당에는 석가삼존불로 추정되는 장륙삼존불상이 있었는데 지금도 돌로 만들어진 장륙삼존불의 대좌가 남아있다. 이 장륙삼존불의 제작에는 당시 신라의 금동불 제작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다시 삼국유사를 찾아 가보자.

 

▲황룡사터 전경

  

▲금당터 초석

 

황룡사가 완성된 지 얼마 안되어 남쪽 바다로부터 큰 배 한 척이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에 와서 정박하므로 뒤져보니 첩문이 있었다. 거기에 쓰여 있기를, “서축(西竺 :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만 품을 모아 석가의 세 불상을 부어 만들려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배에 실어 띄우면서 축원하나니 원컨대 인연 있는 땅에 닿아 장륙의 존귀한 모습이 되어주소서” 라고 하였다.

 

이와 아울러 견본으로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둘을 실었다. 고을 관리가 사연을 갖추어 국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명령하기를, 그 고을 성 동쪽에 깨끗한 터를 잡아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부처를 모시라 하고 실어온 금과 철을 서울로 실어다가 대건 6년 갑오(574) 3월에 장륙불상의 주조가 댓바람에 끝났다. 그 무게가 35,007근이요, 여기에 든 황금이 1198푼이며, 두 보살 불상에 든 철이 12,000근이요, 황금이 1136푼으로 모두 황룡사에 모셨다. 그 이듬해에 장륙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 내려와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국왕이 승하할 징조였다.

 

▲금당터 대좌

 

▲장륙상 대좌

 

또 달리 전해지기를, 아육왕은 석가가 탄생한 후 100년 사이에 서축 대향화국(大香華國)에 살면서 석가의 생존시에 친히 공양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녹여 세 번 부처를 주조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왕의 태자가 홀로 이 사업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왕이 그를 힐책하매 태자가 아뢰어 “혼자 힘으로는 될 일이 아니외다. 벌써 저는 안될 줄 알았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곧 배에 싣고 바다에 띄워 남염부제(南閻浮提) 16개 큰 나라와 500여 개 중간치 나라, 1만 개의 작은 나라들과 8만이나 되는 동리를 모조리 돌아다니면서 갖은 힘을 다 썼으나 어디서도 주조에 성공하지 못하고 최후로 신라국에 도착하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부어만들었다. 불상이 다 되어 그 얼굴 모습이 갖추어지매 아육왕도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장륙상 대좌

 

▲장륙상 대좌

 

그뒤에 중(大德) 자장(慈藏)이 서방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갔을 때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하여 비결을 전수하는 감응이 있었다. 그리고 부탁하여 말하기를, “너희나라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을 한 땅으로 연좌석이 아직 거기에 있다. 이 때문에 천축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워서 1,300여 년이 지난 후에 그것이 너희 나라에 닿아 불상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으니 이는 부처님의 위엄과 인연이 시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불상이 완성된 후에 동축사(東竺寺)의 세 부처님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 모셨다.

<삼국유사 황룡사 장륙(皇龍寺丈六)>

 

이처럼 인도를 가리키는 천축, 또는 서축에 대하여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서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신라인들의 신라불국토사상을 나타내는 말이며 곧 그들의 자긍심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원래 동축사에 있던 세 불상은 황룡사의 서금당에 모셔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당 가운데에는 석가삼존불이 모셔졌고 그 양쪽으로 십대제자상, 동서 양측면에 사천왕상이 그리고 삼존불 앞 좌우에는 범천과 제석천이 모셔졌을 것으로 추측에 되는데 이러한 불상배치는 뒷날 석굴암의 배치에 그대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불상 외에도 금당에는 솔거가 그림 그 유명한 노송도가 걸려 있었다.

 

▲장륙상 대좌

 

▲장륙상 대좌

 

 

 

<2014.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