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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남로에 들어서다 - 중국 슐러(疎勒, Shule) 가는 길

蔥叟 2013. 9. 9. 01:44

서역남로에 들어서다 - 중국 슐러(疎勒, Shule) 가는 길

 

   카슈가르를 출발한 일행은 드디어 서역남로에 들어섰다. 먼저 가는 곳은 슐러(疎勒, Shūlè)이다. 슐러는 그 옛날 소륵국(疎勒国)이 있었던 곳이다. 소륵국은 서역 오아시스 문명의 고대 국가였다. 인도유럽계통의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으며 9세기~10세기 동안에는 기존의 언어가 더욱더 발전하면서 현재 위구르족의 문화를 이룩하게 됐다. 서한 시기에 소륵국은 그렇게 강한 국가가 아니었다. 기원후 2세기부터 큐샨왕조의 왕 카니슈카가 불교를 널리 수용하도록 했다. 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돌궐에 복속되어 매년 조공을 바쳤다. 658년 당나라의 군대는 서역의 칸 아시나투우를 물리쳤고 소륵은 안서도호부에 편입되어 지배를 받게 되었다.

 

▲슐러 가는 길

 

   총령에서 한 달을 걸어가 소륵(疎勒, 카슈가르 Kashgar)에 이르렀다. 외국에서는 가사기리국(伽師祇離國, 카슈가르) 이라고 부른다. 이곳 또한 중국 군사들이 지키고 있다. 절이 있고 스님들도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진다.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으며 본토인들은 모직 옷을 입는다.

 

又從葱嶺步入一月 至疎勒 外國自呼 名伽師祇離國 此亦漢軍馬守促 有寺有僧 行小乘法 喫肉及葱韮等 土人著疊布衣也

 

▲슐러 가는 길

 

   소륵은 중국의 한대(漢代)에 있었던 서역 36국의 하나로 동서교통의 요충지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한서 서역전에는 장안으로부터 9350리에 떨어져 있다는 리(里) 수를 나타내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1510호에 인구 18647명, 군사 2000명이라는 자세한 수치까지 기술되어 있다. 서로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대원 강거 엄채에 이르고 동으로는 북산의 파하(波河)를 지나 옥문과 양관을 거쳐 장안에 이른다. 한 무제 때 서역통로가 개척된 이래 소륵은 급속히 발전하여 동한(東漢) 때는 2만 1000호에 3만 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게 되어 서한(西漢) 때의 인구나 군사의 15배로 증가되었다 한다 당대(唐代)에 소륵은 몇 차례나 토번에 예속 되었다. 당은 서역 경영을 위해 주자, 우기 쇄섭(碎:Say_ab), 소륵에 이른바 안서4진을 설치하였다. 

 

▲슐러 가는 길

 

   구자국(龜玆國) 출신으로 뒤에 중국에 와 귀화하여 역경에 종사하는 등 불교사에 큰 업적을 남겼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소륵에 머물면서 수리야소마(須梨耶蘇摩)에게 대승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구마라습은 처음에 소승에 배우다 대승으로 전향했다. 그가 대승으로 전향하고 난 뒤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지난 날 소승을 배운 것은 마치 사람들이 황금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같았다.”고 술회했다고 구마라습전(鳩摩羅什傳)에 나온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가람이 백 개소가 있으며, 스님들도 만 명이 있고 소승의 설 일체유부를 배운다 하였다. 그러나 자은전(慈恩傳)에는 대승도 유행한다 하였다.

 

▲슐러 가는 길

 

   슐러로 가는 고속도로는 잘 닦여진 4차선 도로였다. 도로 주변에는 역시 넓은 사막과 풀밭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원래 오늘 일정은 잉지스(英吉寺)를 거쳐서 사처로 갈 예정이었으나 고속도로가 새로이 개통되어서 영길사를 가려면 100여km를 돌아서 가야 한단다. 그래서 영길사를 포기하고 그대신 슐러에 있는 서역 개척의 선봉장이었던 한나라 장건의 기념관과 슐러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장건기념관에 도착했다.

 

 

 

<2013.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