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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꿈 - 수원 화성행궁 낙남헌ㆍ노래당

蔥叟 2013. 5. 9. 03:04

정조의 꿈 - 수원 화성행궁 낙남헌노래당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자 건물인데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 기단은 기둥돌과 장대석을 사용하여 틀을 만들고 내부에 벽돌을 채워넣은 특이한 형식이다. 낙남헌은 일제때 화성 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들 중 하나이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음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이라 한 것에서 따온것이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네모반듯한 낙남헌의 기단의 축조방식이 특이하다. 기단은 돌로 네모 난 틀을 짜고 그 안은 벽돌로 면을 채웠다.  또 계단의 측면돌, 즉 우석(隅石)에는 일반 건물에서는 잘 하지 않는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구름문양은 궁궐이나 왕실사당 등 특별한 곳에서만 하는 것이다.

   

    179417일 화성 축성을 시작한 이래 3년의 시간이 흐른 1796910일 마침내 공사가 끝났다. 이날 정조는 매우 감격하여 화성 축성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다. 또한 축성을 기념하고자 1016일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화성의 백성들을 모아 행궁의 낙남헌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낙남헌에 대형 차일을 치고 중앙에 화성 축성 총리대신인 채제공과 수원 부사인 조심태가 자리하고 대형 단에는 공사 감독관들이 자리했다. 아래 넓은 마당에는 화성의 선비들, 백성들, 인근 승려들도 참가했다. 낙남헌의 위 무대에서는 서울과 수원 무희들의 궁중무용이, 아랫마당에서는 광대들의 사자놀이와 산대회가 펼쳐졌다. 이렇듯 화성 낙성연은 단순한 축성 축하 잔치가 아니라 축성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화성의 희망찬 미래를 축원하는 잔치였다.

   

    낙남헌은 단독으로 독립해 있지 않고, 뒤편으로 또 다른 방과 행랑으로 연결되었다. 뒤편 방은 따로 이름을 붙여 노래당이라 했고, 서쪽으로 이어진 행랑은 득중정으로 연결되었다. 낙남헌 서쪽에 딸려 있는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의 글씨는 정조의 친필이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다. 1790 (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정자에서 활을 4발을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하였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라고 한 구절에서 ""자와 ""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노래당은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행사 중에 휴식을 취하기 위한 건물이다. 노래당은 늙은 뒤에 돌아오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담긴 건물이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은 것은 운명에 맏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곳이 고향이다.(老來又委命 安處卽爲鄕)’라는 백거이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가 장차 화성에 내려와 헤경궁을 극진히 모시겠다는 잘 표현한 것이다. 또한 정조가 순조에게 양위하고 내려와 머물려 했던 건물이다.

 

▲낙남헌

 

▲낙남헌

 

▲낙남헌

 

▲낙남헌

 

▲낙남헌 계단

 

▲낙남헌 편액

 

▲노래당

 

▲노래당

 

▲낙남헌 낙성연

 

 

 

<2013.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