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내앞마을 백하구려(白下舊廬)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산실이자, 구국운동의 모체로 알려진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선생의 옛 집인 백하구려(白下舊廬)는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유래가 있는 집이다. 그의 나이 42세 때(1885)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옛집이다. 당호(堂號)인 백하구려(白下舊廬)는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헌신한 백하 김대락(1845~1914)선생이 42세 때(1855)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애국적 논필로 풍운의 한말 정국을 매섭게 비판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따르면 백하구려는 신축 당시 50여 칸의 가옥이었다(1909년5월)고 보도됐다.
'백하'는 김대락의 호이며, '구려'는 옛 집(작은 초가집)이라는 뜻으로 건물의 당호인 백하구려는 김대락이 순국한 이후, 금상기(琴相基)에 의해 쓰여 졌다고 한다.
가옥은 앞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층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래층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로 방이 한 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붙어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아래방·마루방이 1칸씩 배열되어 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 방이 놓이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뻗어 앞채의 아래방에 접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워 장식하였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그의 애국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랑채 앞의 핏빛바위는 '귀신이 나오는 돌'이라 했을 정도로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살육으로 피빛으로 물들었던 바위 협동학교의 주춧돌이었다.
▲백하구려
▲백하구려
▲백하구려
▲백하구려 마당
▲핏빛바위
▲'白下舊廬' 편액
<2012. 4. 13>
'◈한국문화순례◈ > 영가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택(義城金氏宗宅) (0) | 2012.06.07 |
---|---|
안동 내앞마을 귀봉종택(龜峯宗宅) (0) | 2012.06.06 |
영주 숙수사터 금동불입상 (0) | 2012.01.14 |
영주 숙수사터 금동보살좌상 (0) | 2012.01.14 |
예천 와룡동 금동보살좌상 (0) | 2012.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