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쇼소인(正倉院) 소장 신라촌락문서
<국립경주박물관특별전>
신라촌락문서는 통일신라시대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 근처에 있던 4개 촌락에 대한 인문지리적 내용을 기록한 문서로 신라민정문서라고도 한다. 1933년 일본 도다이 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 중창(中倉)에 보관되어 있던 13매의 경질(經帙) 중 파손된 〈화엄경론 華嚴經論〉을 수리할 때 발견되었다. 해서체(楷書體)로 씌어 있으며 약간의 결락이 있다. 이 문서에는 사해점촌(沙害漸村)·살하지촌(薩下知村)·모촌(某村)·서원경모촌 등 4개촌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① 촌명(村名)·촌역(村域), ② 호(戶), ③ 인구(人口), ④ 우마(牛馬), ⑤ 토지, ⑥ 수목(樹木), ⑦ 인구·우마의 변동 등의 순서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촌 단위로 기록된 일종의 촌적(村籍)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동된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가 3년에 1번씩 재작성했다. 작성 연대는 755년(경덕왕 14), 815년(헌덕왕 7), 875년(헌강왕 1)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며 현재로는 확정짓기 어렵고 대체로 8~9세기 무렵의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신라촌락문서
촌의 구역은 주위의 길이로 나타나 있는데, 작게는 4,800보(步)에서 크게는 1만 2,830보에 이른다. 규모가 이처럼 대단히 컸던 것은 주거지와 경작지 외에 주변 산림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 호(戶)는 공연(孔烟)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각 촌은 평균 10여 호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는 호당 평균인구 수가 10여 명에 달하는 큰 규모여서, 자연호라기보다는 편호(編戶)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자연호설을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각 호는 구성 인구수뿐만 아니라 소유 재산에서도 차이가 있어 그에 따라 몇 개의 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중하연(仲下烟)에서 하하연(下下烟)에 이르기까지 4개의 등급만 나타나 있으나, 그 위로 상상연(上上烟)까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통일신라시대에 9등호제(九等戶制)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촌 단위의 경제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계연(計烟)을 산출했는데, 이는 중상연(仲上烟)을 기준수인 1(6/6)로 삼아 각 등급의 호를 9/6~1/6로 매겨 촌 단위로 합계한 수치이다.
인구는 남녀별·연령별로 세분하여 그 숫자를 일일이 표기했으며, 노비도 이에 따라 구분하여 정리했다. 남자는 정(丁)·조자(助子)·추자(追子)·소자(小子)·제공(除公)·노공(老公)으로, 여자는 정녀(丁女)·조녀자(助女子)·추녀자(追女子)·소녀자(小女子)·제모(除母)·노모(老母)의 연령층으로 구분했다. 이중 정 또는 정녀는 15~59세에 해당하는 자로 보이며, 조(녀)자·추(녀)자·소(녀)자는 15세 미만인 자를 연령에 따라 구분한 것이고, 제공(모)과 노공(모)은 60세를 넘은 고령자로서 역(役)의 면제자를 말한다. 4개촌의 총인구는 모두 442명인데, 이중 남자 194명, 여자 248명이다. 이중 노비로 표시된 자는 25명으로 전체의 5.6%에 불과하나 촌 단위까지 노비가 확인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우마는 토지와 수목보다 앞서 기재되어 매우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말은 군사적인 목적과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여 국가적으로 크게 중시했고, 소는 농경에 사역되는 중요한 노동원이었다. 4개촌에 말은 61두, 소는 53두가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상당히 많은 수여서 이 지역이 국가의 우마 사역장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토지의 종류로는 관모전답(官謨田畓)·내시령답(內視令沓)·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마전(麻田) 등이 있다. 관모전답은 국가기관에 예속된 토지로 보이는데, 각 촌에 약 4결씩 비교적 균등하게 배치되어 있다. 내시령답은 사해점촌에만 4결이 설정되어 있을 뿐이고 다른 촌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시령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왔는데, 중앙 관부인 내성(內省)의 사령(使令)으로서 수취관계로 지방에 파견된 하급관리로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유력하나 분명하지 않다. 내시령답은 내시령의 직역(職役)에 대한 대가로 지급한 직전(職田)이다.
연수유전답은 촌민들이 사유하는 일반토지를 말한다. 글자 그대로 새기면 '각 연(烟:戶)이 받아 가진 전답'이라는 의미로서, 이는 722년(성덕왕 21)에 백성들에게 지급했다고 하는 정전(丁田)과 같은 성격의 토지라고 생각된다. 이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하여 촌민들이 이전부터 사유해온 토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것이었다. 연수유전답 중에는 촌주위답(村主位沓)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촌주의 직위에 대한 대가로 국가가 인정해준 촌주의 사유지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는 사해점촌에만 19결 70부가 기재되어 있을 뿐 다른 촌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전은 각 촌에 1결 정도씩 균일하게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각 촌에 배정하고, 촌민들로 하여금 이를 공동경작하게 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귀속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토지에 대한 기록에서 몇 가지 주목되는 것은 첫째, 내시령답과 촌주위답이 사해점촌에만 나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촌주는 촌마다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몇 개의 촌을 묶어 파악한 이른바 '지역촌'의 대표자였으며,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수취책임자인 내시령 역시 촌주가 거주하는 촌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촌 단위로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통일신라시대 토지의 측량단위로 결부제(結負制)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국가는 전국의 토지를 양전사업(量田事業)을 통해 결부의 단위로 엄밀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촌락문서(부분)
수목의 종류로는 뽕나무·잣나무·호두나무 등이 있는데, 그 구체적 수치와 변동까지 문서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는 마전과 함께 이곳의 특산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촌민들이 공동경작해 그 수확물인 삼베·명주·잣·호두 등을 공물의 형식으로 국가에 바쳤을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전 식년(式年) 동안에 일어난 인구와 우마 등의 변동상황이 기재되어 있다. 인구 변동의 원인으로는 출생·사망 등 자연현상에 기인하는 것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이동이라는 사회현상 때문으로 나타난다. 이는 문서의 작성 시기인 8~9세기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농민의 유망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마 변동 역시 출생 및 사망이라는 자연현상 외에 매매에 의한 경우도 있다.
<2012.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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