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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찾아서 - 경주 금강산(金剛山)

蔥叟 2011. 10. 17. 05:50

금강산을 찾아서 - 경주 금강산(金剛山)

 

   금강산은 경주시내 동북쪽에 위치하며 해발 176.8m, 남북길이 2.75km, 동서 0.7m 되는 가늘고 긴 형태의 산이다. 골자기가 깊거나 높지도 않은 평범한 산이기는 하나 신라 초기 설씨 시조인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의 탄강지였으며, 이씨 시조 양산촌장 알평과 표암에 얽힌 전설이 있는 성산이다. 또한 사영지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던 영산이었으며 신라 삼기팔괴 중 하나인 백율송순이 바로 이 산의 소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강산

 

   금강산의 명칭은 처음 왕경에서 볼 때 북족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북산, 북악으로 지칭되다가 법흥왕 14년에 있었던 불교 공인을 위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되면서 불교의 성역이 되었다. 산의 명칭 또한 불교경전에서 유래한 금강산 또는 금강령이라고 불리워졌다. 원래 금강이란 말은 금속처럼 빛나고 단단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불교에서는 부처의 지혜, 부처의 세계를 상징하는 고대인도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遂乃葬北山之西嶺[卽金剛山也. 傳云頭飛落處, 因葬其地, 今不言何也?], 內人哀之, 卜勝地造蘭若, 名曰刺楸寺.

드디어 북산 서쪽 고개(즉 금강산이다.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진 곳이라 전한다. 그래서 그곳에 장사지냈다)에 장사지냈다. 내인들은 슬퍼하여 좋은 곳을 가려서 난야 (蘭若-한가롭고 고요하여 수행에 적당한 곳, 즉 절)를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라고 했다 .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

 

鷄林之北岳曰金剛嶺, 山之陽有<柏,栢>栗寺

계림 북쪽 산을 금강령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는 백율사가 있다.

 

<삼국유사 백률사조>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 東靑松山, 二曰 南于<亐>知山, 三曰 西皮田, 四曰 北金剛山.

신라에 네 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서 의논을 하면 반드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신령스러운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이고, 둘째는 남쪽의 오지산이다.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삼국유사 진덕왕조

 

   이처럼 삼국시대에는 금강산이라면 당연히 경주의 금강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강원도의 금강산은 삼국시대에 어떻게 불렀을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강원도의 금강산은 풍악산 도는 개골산이라 불렸다. 법주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진표율사가 통일 신라 때 개골산에서 발연사를 세우고 법회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사에 제목은 풍악으로 본문에는 개골산이라고 되어 있다. 또 하나는 삼국유사 '융천사혜성가조'에 "화랑의 무리 세 사람이 풍악에 놀러 가려는데 혜성이 심대성을 범하자 그 여행을 중지하려 했다. 그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서 그것을 불렀더니 별의 괴변이 즉시 없어져 왕이 그들을 풍악에서 놀게 했다”는 내용이다.

 

行至高城郡, 入皆骨山, 始創鉢淵藪, 開占察法會.

고성군에 이르러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삼국유사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

 

第五居烈郞, 第六實處郞[一作突處郞], 第七寶同郞等, 三花之徒, 欲遊楓岳, 有彗星犯心大星, 郞徒疑之, 欲罷其行. 時天師作歌歌之, 星怪卽滅, 日本兵還國, 反成福慶, 大王歡喜, 遣郞遊岳焉.

제5거열랑, 제6실처랑, 제7보동랑 등 화랑의 무리 세 사람이 풍악에 놀러가려는데 혜성이 심대성을 범했다. 낭도들은 이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여 그 여행을 중지하려 했다. 이 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서 부르니 별의 변괴는 사라지고 일본 군사가 저희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낭도들을 풍악에 보내서 놀게 했다.

 

<삼국사기 융천사 혜성가조>

 

   본래 화랑은 명산대첩을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수련했던 무리인 만큼 이때 이미 풍악(금강산)은 명산으로서 화랑들의 유람처가 되었던 것 같다. 흔히 이러한 점 때문에 화랑은 자연을 중시하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리 전래의 산악숭배, 신선사상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

 

  개골산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잘 알려진 마의 태자가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여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가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에 등장한다.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群下謀, 擧土降<太祖>. 群臣之議, 或以爲可, 或以爲不可. 王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 齎書請降於<太祖>.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9년 겨울 10월,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로 되어,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였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왕자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 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전>


   이처럼 신라시대의 금강산은 '풍악' 과 '개골산'으로 불리고 있었다. 풍악이나 개골산은 옛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 은둔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산이 깊고 아름다우니 세상을 떠나 은거하기에는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이고, 이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산악숭배사상이나 신선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시대에는 국가제사와 관련하여 금강산을 상악이라고 불렀다.

 

○三山五岳已下名山大川, 分爲大, 中, 小祀.

3산 5악 이하 명산 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된다.

 

○大祀, 三山: 一<奈歷{柰歷}> [<習比>部], 二<骨火>[<切也火郡>], 三<穴禮>[<大城郡>].

대사는 세 산에 지냈는데, 첫째 나력산[습비부], 둘째 골화산[절야화군], 셋째 혈례산[대성군]이었다.

 

○中祀, 五岳: 東<吐含山>[<大城郡>], 南<地理山>[<菁州>], 西<鷄龍山>[<熊川州>], 北<太伯山>[<奈已郡>], 中<父岳>[一云<公山>, <押督郡...이하생략 

중사는 오악(五岳)과 사진(四鎭)과 사해(四海)와 사독(四瀆)에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오악(五岳)은 동쪽의 토함산[대성군], 남쪽의 지리산[청주], 서쪽의 계룡산[웅천주], 북쪽의 태백산[나이군], 중앙의 부악[공산이라고도 한다. 압독군]이다...이하생략

 

○小杞{小祀} : <霜岳>[<高城郡>], <雪岳>[<水城郡>], ...이하생략

소사를 지낸 곳은 다음과 같다. 상악[고성군], 설악[수성군], ...이하생략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


   신라는 사직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신라 때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크게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되었다. 물론 가장 큰 제사가 대사이다. 그런데 금강산 즉 상악은 소사를 지냈던 곳이다. 이로 보아 금강산은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시 하던 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은 북쪽에 치우쳐 있어서 경치 좋은 명산, 은둔하기 좋은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국가적으로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0여 곳이 넘는 소사 지역의 하나로 겨우 포함될 정도였다. 물론 조선시대의 5악에는 금강산이 포함되었다. 5악의 중앙은 삼각산, 동악은 금강산, 남악은 지리산, 서악은 묘향산, 북악은 백두산이었다. 

   결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토대로 보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금강산은 강원도의 금강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주의 금강산이었다. 강원도 금강산의 명칭은 풍악, 상악, 개골산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풍악은 가을이면 온통 단풍천지로 되는데서 유래한 이름이고, 개골산 겨울에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흰눈에 덮인 기묘한 바위들만 우뚝 솟아있는 것이 마치 뼈만 남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악은 새하얀 산봉우리가 서릿발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

 

   강원도 금강산이 본격적으로 금강산이란 이름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로 보인다.  <고려사>에서는 금강산이란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즉, 고려시대부터는 금강산이란 이름이 공식 명칭으로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사> 지리지의 금강산 항목에는 “풍악 또는 개골산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무수한 봉우리가 눈 속에 솟아 있는데 높고 험한 모습이 비할 바 없이 기묘하며 절이 매우 많다. 이 산에 대한 소문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풍악, 개골산이란 이름을 대신하여 불교적인 명칭인 금강산이 공식 명칭이 되었음이 확인된다.

 

   이처럼 경주의 금강산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오히려 강원도 금강산의 유명세에 묻혀 소금강산이라 불리고 있는 사실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외지인들은 물론이고 경주인들마저 그렇게 인식하고 사용하고 있음은 더욱 슬프게 한다. 이후부터 소금강산 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011.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