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광개토태왕비

2011. 9. 19. 05:18◈한국문화순례◈/북방문화권

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광개토태왕비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다. 사면석비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에 태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라는 뜻이다. 능비는 지금의 압록강 중류의 중국 길림성 집안형 동북쪽 약 4.5km 지점인 태왕촌대비가에 서 있으며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이 있다.

 

▲광개토태왕비각

 

   능비는 동쪽으로 45도 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향 방향으로 서 있으며, 1928년부터 1976년까지는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의 발기로 세워진 2층 비각 속에 있었으나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세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비 주위는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철책으로 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능비는 대석과 비신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대석과 비신의 일부는 땅 속에 묻혀 있다. 대석은 약 20cm 두께의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은 것인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장방형으로 3면을 제회하고는 모두 깨어졌다.

 

   비신은 방주형의 각력응회암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으로 너비 1.35m~2m, 높이 6.39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크기이며 개석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4면에 모두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비문이 조각된 면적은 각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5.5m 높이에서부터 조각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cm 간격으로 종선을 그었다. 여기에 한예의 팔분서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 정도 크기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현재에 약 5mm 깊이의 흔적이 남아있다. 비신의 4면에는 모두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능비는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잊혀졌다가 19세기 말에 재발견 되엇다. 능비의 존재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문헌들이지만, 능비가 고구려의 유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지봉유설>등에는 능비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비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불량과 탁본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1887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호태왕비 편액

 

   거의 같은 시기인 1885년경부터는 중국학계에서도 비에 대한 조사와 금석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뒤 1899년경부터는 일본, 천나라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매매응 하기 위해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감행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비면의 마멸과 일부 문자가 오곧되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쌍구본이나 석회부도 후의 탁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 1890년대 이전의 원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능비연구에 난점을 안겨주고 있다.

 

   그 뒤 공백기를 거쳐 1957년부터 임지덕 등 일부 중국학자에 의하여 능비 주변의 유적이 재조사되기 시작하였다. 1963년에는 박시형을 비롯한 북한학자와 중국학자들의 공동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으며, 1981년부터 왕건군을 중심으로 한 중국학계의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왕건군의 <호태왕비연구>가 공표된 1985년 이후에는 일본학자의 현지조사가 허가되어 최근에는 <호태왕비탐방기> 등이 일본에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서문격으로 제1면 1행에서부터 1면 6행에 걸쳐 추모왕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으로부터 광개토태왕에 이르는 태왕의 세계와 약력 및 비의 건립경위가 기술되어 잇다. 제2부는 비문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으로 제1면 7행부터 3면 8행에 걸쳐서 태왕의 정복활동과 토경순수 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3부는 3명 8행부터 4면 9행에 걸쳐서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 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광대토태왕비

 

   비문의 기사내용 중 제1부의 고구려 건국신화와 제3부의 수묘인 기사도 고구려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나, 종래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제2부의 정복기사이다. 비분의 마멸과 <삼국사기> 및 <자치통감> 등 문헌 사료와의 차이에 다라 학계의 견해가 통일되어 있지 않으나, 정복기사는 형식상 8개의 기년기사와 2개의 종합기사로 구분할 수 있으며, 비문의 내용과 구성상의 쟁점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전반부의 기사는 비려의 정체와 염수의 위치에 대한 견해가 엇갈려 있어 정복대상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대체로 사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거란을 정복한 기사로 추정된다. 후반부의 순수기사는 유동적인 국경지대의 통치권을 재확인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성격의 기사로, 이때에 이으러 요하 일대가 고구려의 영역으로 완전히 편제되었음을 뜻한다.

 

   신묘는 기사는 능비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고 있는데 다른 기년기사와는 형식을 달리하고 있다.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라는 내용의 기사이다. 현재 신묘년기사의 문자판독이나 기사성격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 보다는 대체로 영락6년의 백제정벌 및 8년의 신라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 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되며, '海'자를 비롯한 일부 문자가 변조 내지 오독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제1면

 

   영락6년에는 태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관미성, 아단성, 등 58성과 7백촌을 공파하고,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도성까지 육박하였다. 이에 백제의 아신왕이 영원히 신하기 되겠다는 맹세를 하고 항복하므로, 태왕이 은택을 베풀고 백제왕이 바친 생구와 인질 및 세포를 받아 개선하였다고 한다. 이 때의 작전지역은 대체로 황해도 남부에서 한강유역 및 서해안 일대에 걸친 지역으로 보이며 전쟁의 결과 백제와 예속적인 지배관계인 조공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영락8년에는 소규모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지역의 토곡을 관찰하고, 이어서 인접한 국가의 가태라곡 등에서 3백여 인의 민호를 획득하는 한편, 이 후부터는 조공관계를 맺기로 하였다고 한다. 문자의 마멸과 구체적인 국명의 생략으로 종래부터 8년기사의 정복대상을 연해주 일대의 숙신이나, 강원도 일대의 예로 비정하는 경해가 있어왔다. 그러나 이는 8년기사 전체를 동일한 성격의 기사로 보앗던 때문으로, 전반부와 후반부의 기사가 동일한 지역의 작전기사가 아니라는 점과 동예는 채조왕 때, 숙신은 서천왕 때에 고구려가 이미 정복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반부의 기사는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 토경을 관찰한 기사이며, 후반부는 산악을 경계로 하여 이에 인접한 국가, 즉 신라에 대한 복속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이로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조공지배권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영락9년에는 백제가 전일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자 이를 응징하기 의하여 평양으로 남순하였는데, 이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전일에 이미 태와의 덕화에 귀의하여 신하가 되엇음을 전제로 국경에 침구한 왜구를 격퇴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를 명분으로 영락10년에 왕은 5만의 보기를 파견하여 낙동강유역에서 왜를 격퇴하고 임나가라를 복속시키는 한편 신라를 구원하였다. 그결과 종래와는 달리 신라국왕이 직접 고구려에 조공하였다고 한다.

 

▲제2면

 

   영락10년의 경우 결락문자가 많아 종래부터 이론이 많은 부분이나 명확한 것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조공지배가 강화되엇음을 나타내는 기사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왜는 신라나 가라와는 달리 공파나 복속의 대상이 아니라, '퇴, 추, 멸'의 대상이엇다는 점을 본다면 당시의 왜는 고정된 거점이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한 비문의 임라가라는 대가야의 원명으로 추정되며, 작전과정에서도 가라, 안라 등이 주이며, 왜는 종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문의 기사는 일본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성의 근거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반증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뒤 후연과의 전쟁으로 고구려가 소흘해진 틈을 타 백제가 영락14년 왜병을 앞세워 고구려의 대방계에 침입하니, 대왕이 친히 수군과 친위병을 동원하여 이를 격파하고 무수한 왜구를 참살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백제의 도전에 대한 본격적인 응징은 후연과의 전투가 고구려의 승리로 일단락된 뒤인 영락17년에 이루어진 것 같다. 영락17년에 대왕은 5만의 보기를 파견하여 백제의 후방영역 깊숙이 쳐들어가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개선하는 길에 사구성 등 6개의 성을 공파, 획득하였다고한다. 영락17년의 경우 후연의 숙군성 공략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의 숙군성 공략은 영락 11년의 일로 연대가 맞지 않으며, 능비가 건립된 장수왕대에는 이미 후연을 이은 북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이 때의 고구려에 있어서는 이미 요하선의 확보가 새로운 영토확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던 까닭에, 능비에서는 숙군성 공략 기사뿐만 아니라  후연 정벌기사 전체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3면

 

   후연과의 공방전과 남진정복이 일단락 된 뒤인 영락 20년에 대왕은 조공을 중단한 동부여를 친정하였는데, 동부여가 저항없이 왕의 덕화에 귀의하자 대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을 베풀었다. 여기에서의 동부여는 국초의 동부여라기보다는 모용씨에 쫓긴 북부여의 잔류세력이 이동하여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그 지역은 두만강 유역에서 연해주 일대로 여겨진다. 작전의 성격에 있어서도 군사작전이라기보다는 국내 영토의 순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정복기사의 마지막에는 대왕이 공파한 성이 64, 촌이 1400이다. 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외정의 총수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영토로 편입한 것만을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정복기사는 단순히 외방에 대한 정토기사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토와 복속 및 토경순수라는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유기적 관련을 갖고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능비의 정복기사는 정토의 명분에서 결과에이르기까지 고구려인의 자존적 국가의식과 대외의식을 배경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서 주 정복대상은 백제와 신라 및 가라, 동부여였으며, 왜와 비려는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및 가라, 동부여를 왜, 비려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세력권 내의 민족집단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은 한민족사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통일의지의 표현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제4면

 

 

 

<2011. 8. 2>

광개토태왕비문.hwp

 

광개토태왕비문.hwp
0.0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