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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 신안현 천당지재(千唐志斋, Qiāntángzhìzhāi)

蔥叟 2010. 10. 26. 06:13

중국 낙양 신안현 천당지재(千唐志, Qiāntángzhìzhāi)

 

千唐志斋由辛亥革命元老张钫先生二十世纪二十年代创建, 馆藏唐人墓志石刻二千余方, 是全国重点文物保护単位, 中国唐史硏究基地, 盛唐文化营地, 中国书法圣地. 所藏志石和历代名家书画碑刻是硏究唐代三百年历史兴衰书法艺术的史料宝库.

  

천당지재(千唐志斋)

 

천당지재(千唐志斋)

  

这些志石讲述看女皇帝武则天的文治武功. 宰相李德裕的宧海沉浮, 大唐安史之乱的民不聊生, 酷吏周兴的惨无人道, 女道士马凌虛的红颜薄命,众宮女鲜为人知的悲苦人生, 莫不令人时而惊奇, 时而欢愉, 时而叹息. 历史古事, 引人入胜; 人生百态, 无所不及.

   

천당지재(千唐志斋)

 

▲강유위서칩려(康有为书蛰庐)

 

这里珍藏有唐代宰相狄仁杰, 大书法家徐浩, 宋徵宋赵, 宋书法家米만(艹+帀), 元代书法家赵孟頫, 明代书法家董其昌, 淸代书画家郑板桥, 神芼王铎, 宰相书法家刘墉, 近代草圣于右任, 帝师康有为等历代名家的书画碑刻. 书艺之美或似虬龙之蜿蜒, 或若鸾凤之徘徊, 足见惊雷掣电之功, 统摄铿锵之意, 堪称书法圣地.

 

 

 

은향독화지실(听向读画之室)

 

은향독화지실(听向读画之室)

 

这里的园林独具风格, 建筑典范, 中西合璧, 旣是文人墨客的理想之所, 又是艺艺游客的最佳去处.

 

千唐志斋以其藏品的千唐志斋特性和珍贵性吸引了众多国家外游客, 国家领导人李长春, 王兆国, 李铁映等都曾经到千唐志斋参观. 中国书法家协会主席舒同, 启功, 沈鹏, 张海以及众多知名书画家在游览千唐志斋之后, 都叹为观止幷留下了珍贵的墨宝. 联合国敎科文组织驻华代表野口升先欣然题词 : 洛阳千唐志斋是重要的文化遗产.

 

▲서방창미(书房窗楣) '수비과객(誰非過客)'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서쪽 45km에 위치한 천당지재(千唐志斋)는 손문과 함께 신해혁명을 일으켰던 상장(중장 계급) 출신 ‘장방(張鎊, 1905--1986)’이 고향에 은거하면서 1921년에 조성한 곳이다. 장방은 고향 은거 이후 1930년대에는 하남성장 대리와 민정감찰청장을 역임하기도 한 인물이다. 천당지재는 중국 유일의 묘지명(墓誌銘) 박물관으로서 중국 당나라 역사의 연구기지이자 낙양 8대 관광명소의 하나이다. 이 전람관에는 서진, 북위로부터 당, 송, 원, 명, 청에 이르는 중국 역대의 묘지석각(墓志石刻) 1185개를 수집하여 전람관을 꾸렸는데, 그중에서 당나라시기의 묘지명이 가장 많다. 그리하여 천당지재(千唐志斋)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였다고 한다.

  

▲서방창미(书房窗楣) '화시주인(花是主人)'

 

▲칩려(蟄廬)

 

   이 전람관은 명실공히 돌에 쓴 당나라의 역사책 - 석각당서(石刻唐書)라고 할 수 있다. 이 석각들은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중국의 전각예술이나 서예의 발전맥락을 더듬어 보고, 묘지명이라는 이 중국 고전 문학의 특수한 문체의 변천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주요한 인식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천당지재 묘지명은 지금부터 1400년여 전인 서진(西晉)과 북위(北魏) 시기의 정사외의 비사를 기록하고 있어 사료로서도 매우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당나라 서예의 변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묘비명에는 지금은 쓰이지 않고 있지만 측천무후가 창제한 20여개의 한자를 볼 수 있어 이채롭다. 무주제자(武周制字)라고도 하는 이 문자는 측천무후 즉위해인 690년에 반포하여 사용하다가 당 중종이 복위한 705년에 사용을 중지한 특별문자이다.

  

▲원림(园林)

 

▲비(碑)

 

   장방은 천당지재(千唐志齎)에 있는 자기의 서재 출입문우에 걸어놓은 편액에다 다음과 같은 시귀를 남겨 놓았다. <誰非過客, 花是主人 누구는 과객이 아니더냐, 꽃이야말로 주인인걸> 살아 생전에 떵떵거렸고 죽어서도 영원히 이름을 천추에 길이 빛내려고 옥돌에 자기의 공적을 기록하여 무덤속에 묻어 둔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부질없는 짓거리임을 천당지재(千唐志齎)에 진렬된 천여개의 역대 제왕장상과 고관대작, 부호거상들의 묘지명들이 말해주고 있다. 

 

  

▲비(碑)

  

▲묘지(墓志)

 

   해해년년 피는 꽃은 비슷하지만 인간은 생로병사와 세상의 수많은 풍파와 시련을 겪으면서 해해년년 늙어 가다가 나중에는 누구나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내리게 된다. 그러니 우주자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꽃이라는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우주자연은 영원하고 무궁한 존재이지만 우리 인간은 잠시적인 시간과 유한한 공간밖에는 차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 무한한 우주에서 총총하게 걸어가다가 사라져 버리는 과객(過客)임이 분명하다. 

  

▲묘지(墓志)

 

▲측천무후자 묘지(墓志)

 

   이곳에는 2천여 점의 묘지명이 소장돼 있는데 이중 8백여 점은 아직 정리가 덜 끝나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 묘지명은 죽은 자의 인적사항 즉 성명, 왕조, 관직, 본적, 약력, 추모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통 관 위에 부착된다. 천당지재는 주은래 시절에 국가에 헌납돼 현재는 중국정부가 임명하는 관장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측천무후자 묘지(墓志)

  

▲측천무후자 묘지(墓志)

 

   천당지재(千唐志齎)에 진렬되어 있는 천여개의 묘지명은 모두 낙양의 북망산(北邙山)에서 수집된 것이다. 도굴꾼들이 북망산(北邙山) 묘지를 도굴한 후 버린 묘지명을 수집하여 벽면에 상감(象嵌)한 것으로 황제부터 궁녀에 이르기까지의 신분을 보여주는 크기에 따라 전시돼 있다. 낙양은 기원전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최초로 도읍을 정한 이후 후한(後漢)을 비롯한 서진(西晉)·북위(北魏)·후당(後唐) 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 번창했던 곳이다. 낙양성 북쪽에 있는 망산은 동서로 100여리나 뻗어있는 산줄기이다. 후한 이후 일곱 기의 황릉과 함께 귀족들의 무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같은 연유로 어느 때부터인가 북망산은 사후 세계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게 됐고 지금도 북망산천(北邙山川)하면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북망산 가는 길 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 됐다.

 

▲측천무후자 묘지(墓志)

 

▲측천무후자 묘지(墓志)

 

   토층이 두텁고 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중국의 풍수지리학설에 의하면 명당자리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역대의 제왕장상과 고관대작, 부호거상(富豪巨商)들은 모두 망산을 풍수보지(風水寶地)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심지어 강남이나 북방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임종에는 자기를 북망에 묻어 달라고 자손들에게 유언을 남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는 옛날부터 <생전에는 소항에서 살고 죽어서는 북망에 묻히고 싶다>는 말이 전해 내려 오게 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백거이는 <북망에는 높고 낮은 저 무덤이 총총하네(北邙塚墓高嵯峨)>라는 시귀를 남기기도 했으며 민간에는 <북망에는 소가 누울 자리도 없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했던 것이다. 

 

▲측천무후자 묘지(墓志)

 

▲묘지(墓志)

 

   이런 제왕장상과 고관대작, 부호거상의 무덤들속에 묻혀있는 순장품들을 도묘(盜墓)의 기풍이 성행하게 했다. 묘도둑들은 값어치가 나가는 금은붙이 같은 순장품에 눈독을 들일 뿐이였지 무겁고 게다가 저자거리에 나가서 팔지 못하는 비석이나 묘지명 같은 것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청나라말기에 롱해로를 닦을 때 북망산 기슭을 관통하게 되였는데, 당시 발굴된 비석이나 묘지명들이 숱해 민가들에 버려지거나 밭두렁에 던져지기도 했었다. 물론 이런 묘지명의 주인들은 단 한명의 민초도 없고 청일색으로 역대의 제왕장상과 고관대작, 부호거상들이였다.

 

▲당재상 이덕유 묘지(墓志)

  

▲묘지(墓志)

 

   천당지재는 당나라 3백여 년 서예 사료의 보고로서 전시품 중 정판교(鄭板橋), 미원장(米元章), 왕탁(王鐸), 강유위(康有爲) 등의 서예작품은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곳 천당지재의 제호는 근대 중국의 3절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서예가 장태염(張太炎), 조각가 오창석(吳昌錫), 문장가 우우임(于右任) 등에 의해 제자(題字)되고 판각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는 당나라 시대에 낙양에서 무장으로 활동했던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인물 고현(高玄)의 묘지명이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전시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묘지(墓志) 불상조각

 

▲묘지(墓志)

 

   천당지재에는 묘비명 외에 각석(刻石)들도 수집되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두 점이 특히 유명하다. 하나는 건륭황제 시 승상 유용(劉墉)의 작품으로 유용은 얼굴은 험하게 생겼으되 마음은 원활(圓猾)하여 내시 화곤(和坤)과의 갈등과 권력투쟁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주군은 원활(圓猾)하게 모시는 한편 백성에게는 봉사한 지혜로운 재상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캐릭터로 인기리에 방영되어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승상 유용의 각석 서체는 처음엔 절제된 모습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원래의 성격이 드러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유용의 독특한 캐릭터가 서체에 잘 드러난 작품으로 유명하며 주군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와 같이 사는 것과 같다(伴君如伴虎)는 2인자의 슬기를 보여준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묘지(墓志)

 

▲묘지(墓志)

  

   다른 판각은 청나라 말기의 관리가 관직을 잃고 장씨 집안에 기숙하면서 그 집 화원의 땅바닥에 손톱으로 친 난으로 직함과 권세를 잃은 슬픔과 아쉬움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집주인 장씨는 한 장의 천으로 땅바닥의 이 작품을 덮어 잘 보존하였다가 탁본하여 재생한 것으로 그 관리가 남긴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판각의 난은 뿌리가 공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의 기운이 하늘로 뻗치고 있어 정권을 다시 탈환하겠다는 작가의 결의를 잘 보여주고 있는 진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묘지(墓志)

 

▲묘지(墓志)

 

▲묘지(墓志)

 

▲묘지(墓志)

  

정판교죽자사태병(郑板桥竹姿四态屏)

 

정판교죽자사태병(郑板桥竹姿四态屏)

 

정판교죽자사태병(郑板桥竹姿四态屏, 부분)

  

정판교죽자사태병(郑板桥竹姿四态屏, 부분)

 

정판교죽자사태병(郑板桥竹姿四态屏, 부분)

 

정판교죽자사태병(郑板桥竹姿四态屏, 부분)

 

▲묘지(墓志)

 

▲묘지(墓志)

  

▲묘지(墓志)

 

▲난

 

▲난(부분)

 

▲난(부분)

 

▲묘지(墓志)

  

▲묘지(墓志)

 

▲여황제무측천창조문자(女皇帝则天创造文字)

  

 

 

<2010.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