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계림(鷄林)과 금궤도(金櫃圖)
‘계림鷄林과 금궤도金櫃圖’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계림고사도鷄林故事圖>라 부르기도 한다. 윗면에 인조仁祖(재위 1623-1649)의 어제御製가 포함된 글이 있어 누가, 언제, 왜 그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조속은 감찰기관인 사헌부의 장령掌令(종4품)을 지내기도 했으나 문예, 서화에 전념하였다. 시, 서, 화에 능하고 영모翎毛, 절지折枝, 매죽梅竹을 잘 그렸는데, 자신의 작품에 도장이나 제목을 잘 쓰지 않아 <금궤도> 외에 그가 그렸다고 알려진 그림은 많지 않다. <금궤도>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그린 그림 중에 찾아보기 힘든 채색화인데, 왕의 명에 따라 고사故事를 그렸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긍정적으로 보는 <금궤도>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혼란스러웠던 17세기,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금궤도(金櫃圖) 전도
▲금궤도(金櫃圖) 부분도 금궤
한편 금궤도의 실제 장소인 계림에 전해오는 고사(古事)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평 3년(60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 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의 궤가 나 무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그대로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로 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궁으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 이 서로 기뻐하면서 춤을 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삼국유사 김알지탈해왕대조>
▲금궤도(金櫃圖) 부분도 계림산수
▲금궤도(金櫃圖) 부분도 금궤
▲금궤도(金櫃圖) 부분도 석탈해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과 비슷하지만 다소 차이가 나게 기록되어있다.
○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왕 9년조>
▲금궤도(金櫃圖) 부분도 흰닭
<2010.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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