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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의시 송진종 영정릉(宋眞宗永定陵, Yǒngdìnglíng)

蔥叟 2010. 9. 19. 06:17

 중국 공의시 송진종 영정릉(宋眞宗永定陵, Yǒngdìnglíng)

 

位于河南巩义. 北宋九帝, 除徵钦二帝被金兵掳去死于北国, 其余七帝葬于巩. 有宋太祖永昌陵, 宋太宗永熙陵, 宋眞宗永定陵, 宋仁宗永昭陵, 宋英宗永厚陵, 宋神宗永裕陵, 宋哲宗永泰陵, 加上赵匡胤之父赵弘殷永安陵, 统称 “七帝八陵”. 还附葬有皇后, 皇室宗亲, 包拯, 寇准等勋臣名將墓近千座, 分布面积180余平方公里. 形成规模庞大的陵墓群. 地面石刻近千件, 是座典型的宋代石刻艺术博物馆. 现为国家級重点文物保护単位.

 

   영정릉은 북송의 3대황제인 진종의 능이다. 능 입구에는 화표석이 양쪽으로 서 있고 화표석 안족으로 호랑이와 타조 등 여러 신수상이 서서 능을 지킨다. 신수상 안쪽에는 여러 번국에서 온 번신상이 어있다. 번신상 안쪽에는 문신상과 무신상 등이 있고 , 그 안쪽에 봉분이 자리잡고 있다.

 

   송 진종(宋 眞宗, 968 ~ 1022년)은 중국 북송의 제3대 황제(재위 998 ~ 1022년). 휘는 조덕창(趙德昌)이며 이름은 조항(趙恒), 시호는 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무정장성원효황제(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이다. 유교를 강화하고 북쪽의 유목민족인 거란족과 휴전조약을 체결하여 몇십 년 간 지속되던 전쟁을 끝냈다. 이때 체결한 산하이관[山海關] 조약(1044)으로 송은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燕雲) 16주를 영구히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진종은 신의 계시라고 하여 잇달아 새로운 제식(祭式)들을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유교의 경쟁 상대였던 불교와 도교의 혼합물이었다. 또한 유교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1011년 모든 지방 도시들에 공자의 사원을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이러한 개혁으로 백성들에게 천자의 정통성을 더욱 강하게 인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정신이상이 생겨 그의 황후가 권력을 잡았다.

 

   진종의 부왕인 송태종(宋太宗) 조광의에 의해 확립된 과거제도는 진종(眞宗) 대에 완성되었다. 과거제도의 확립은 황제독재권의 강화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과도한 문관대우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여 송나라를 침공하였다. 진종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맞아 싸웠으나 요나라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했다. 이를 '단연의 맹세'라 한다. 1005년 송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서하의 덕명(德明)은 송나라와 화의하고 송 황실로부터 조(趙)씨 성을 하사받고 은주, 유주 절도사의 직책을 받는다. 진종은 1022년에 붕어하고 북송 인종이 즉위하였다. 

 

▲영정릉 전경

   

▲영정릉 전경

 

▲화표석

  

▲신수상

  

▲신수상

 

▲신수상

  

▲신수상

  

▲신수상

 

▲번신상

  

▲번신상

 

▲번신상

 

▲번신상

 

▲신수상

  

▲무신상

 

▲무신상 상호

 

▲문신상

  

▲능비

 

▲최근 능비

 

▲문신상

  

▲봉분

  

▲무신상

 

▲사자상

 

▲사자상

 

▲문신상

 

▲문신상

 

▲문신상

 

 

 

<2010.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