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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석빙고

蔥叟 2010. 7. 13. 05:00

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석빙고

   

월성의 북쪽 성벽 중간지점에 성루(城壘)를 잘라서 남족에 입구를 내고 안으로 들어갈 수록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얼음에서 녹아내린 물이 성 밖으로 배출되도록 바닥 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된 석빙고가 있다. 내부는 동서로 홍예처럼 된 석재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석과 홍예석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다 배기공을 설치하였는데, 현재 배기공 위를 덮고 있는 석재는 근래의 수리 때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한 것으로 원래의 것은 아니다. 출입구 높이는 1.78m, 너비 2.01m의 크기로 만들고 게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석빙고

  

석빙고

    

석빙고

 

얼음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신라 3대 유리왕 때와 지증왕 때의 기록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전한다.

 

○始製黎(犂)耜及藏氷庫

그때 처음으로 쟁기와 보습과 얼음 저장 창고를 만들었다.

 

<삼국유사 제3노례왕조>

 

○육년 동십일월, 시명소사장빙

6년 겨울 11월 소관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

 

<삼국사기 심라본기 지증왕전>

  

이는 우리 나라에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여름에 사용한 예가 적어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현재의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신라시대 축조설과 조선시대 축조설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일제시대 일인학자들에 의해 후자는 최근 60년대 진홍섭 등에 의해 제기되었다. 진홍섭은 조선시대 이곳에 석빙고를 설치한 이유로는 성 남족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라다는 점과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잇엇다는 점 등을 들고 난 뒤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다른 석빙고 들과 같다는 것을 이유로 조선시대 축조설을 주장했다.

 

석빙고 환기구

  

석빙고 환기구

  

석빙고

   

석빙고 좌측에 있는 비문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에 당시 경주부윤이던 조명겸이 목조 빙고를 석조 빙고로 다시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이라는 명문이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 정도 옮겨 현 위치에 다시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자리에는 웅덩이가 남아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원래는 나무와 풀로 만든 목빙고(木氷庫)였는데 해마다 수리를 하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천변 경사진 곳에 설치하여 얼음을 떠서 운반하기에 편리하며 배수가 잘 되어 얼음이 녹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한편 권오찬은 조성 영조 당시 인적마저 외딴 이곳에 석빙고를 축조하였을 ㄲ닭이 없다고 하여 신라시대의 것을 개축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곳에 보관한 얼음은 왕실에 환자가 발생하면 찜질을 하는 데도 사용하였고 공신들에게 선물로 지급하거나 여름휴가 때에도 지급하였다. 얼음은 대단히 귀하고 중요시하여 강력하게 통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석빙고는 원래 있던 돌문 대신 철제문(鐵製門)이 달려 있지만 석빙고의 원형에 대한 연구나 분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석빙고 내부

    

석빙고 내부

 

석빙고 내부

 

   석빙고가 축조 당시에는 돌문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학계에서는 돌문을 복원해 달아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또 돌문은 월성 내에 있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이 있어 이 돌문을 찾아 내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빙고의 돌문이 월성의 서북쪽 둔덕, 즉 계림에서 월성으로 오르는 길의 서쪽에 파묻혀 있으며, 깊이 파묻혀 있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발굴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지역 노인들의 증언도 있다.

 

 

 

<2010.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