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포석정
신라왕실의 별궁이었던 포석정은 남산 포석계의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일대를 성남 이궁터라고 부른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했을 때 머무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곳은 왕족과 귀족들의 놀이터 또는 남산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곳의 건물터는 알지 못하고 있는데, 오직 옛 모습 그대로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개울가 바위 위에 자리잡은 포석정 뿐이다. 돌에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 받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 홈모양이 구불구불하여 전복껍질 모양과 같으므로 포석정(鮑石亭)이라 하였다.
▲포석정
포석정은 본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AD300년경 중국의 왕희지(王羲之)가 집안에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작은 섬을 만들어 시인묵객들이 시를 지으면서 연못에 술잔을 띄워 벌주를 마시는 놀이를 하던 것이 중국 전체에 퍼지고 신라의 경주까지 전해진 것인데 이를 유상곡수(流上曲水)라고 한다. 그러나 신라의 포석정은 조각솜씨가 아주 우수한 것으로 보아 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여겨져왔다.
포석정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인식은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이 이곳에서 놀다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살해된 곳으로 신라 멸망의 상징적인 장소로 알려져 있다. 고려, 조선시대의 시인들이 신라패망의 비운을 노래한 곳이다. 천년 동안 사직을 지켜온 신라의 종말이 이 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니, 이곳은 언제나 원한의 대상으로 미움을 받아왔다.
▲포석정
○四年, 秋九月, <甄萱>侵我軍於<高鬱府>, 王請救於<太祖>, 命將出勁兵一萬往救. <甄萱>以救兵未至, 以冬十一月, 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 倉猝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 奔走逃竄. 其爲賊所虜者, 無貴賤皆駭汗匍匐, 乞爲奴僕而不免. <萱>又縱其兵, 剽掠公私財物略盡, 入處宮闕,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强淫王妃, 縱其下, 亂其妃妾. 乃立王之族弟, 權知國事, 是爲<敬順王>.
4년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하여 정병 1만 명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겨울 11월에 서울을 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게 후궁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라고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견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왕을 찾게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을 데리고 후궁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 갔다. 견훤은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고,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의 아우뻘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다. 이 사람이 경순왕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조>
▲포석정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도 포석정은 신라의 종말을 고한 장소로 그려지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천성 2년 정해(927) 9월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에 이르자,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했는데,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견훤은 그해 겨울인 11월에 신라의 서울을 쳐들어 갔다. 이 때 왕 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어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처들어 오는 것도 모르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붙잡혔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기를 애원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 그리고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도록 했는데,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궁중으로 끌어다가 왕은 강제로 자결토록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인 부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것이 되었다. 이가 경순왕으로서 그는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이 때 우리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조상했다.
<삼국유사 김부대왕조>
▲포석정
그러나 포석정은 신라인들의 유희장만은 아니었다. 포석정은 신라왕이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면서 여흥을 즐기며 술잔을 띄우던 신성한 곳이었다. 또한 그 위치도 남산신성에서 가까운 곳이다. 신성이 어떤 곳인가? 신성은 나라가 위급할 때 신라의 조정이 피난가는 곳이며 이곳에서 항전을 벌이는 곳이다. 적과 항전을 벌이는 가까운 장소에서 유희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견훤이 신라를 칩입할 당시는 12월 한겨울이었고 신라조정에서는 견훤이 이미 영천까지 진주한 것을 알고 개성으로 사신을 보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해놓고 있는 상태였고, 왕건은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경주로 이동 중이었다. 즉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던 경애왕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를 보자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나갔더니 남산의 산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 측근자들은 못 보는데 왕만이 이것을 보았다. 그것이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는 대로 왕도 이것을 따라 스스로 춤을 추어 보였다. 그 귀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祥審)이라고도 하므로 지금까지도 우리 나라의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해오면서 어무상심(御舞祥審)이라고도 하며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더러는 말하기를 원래 그 귀신이 나와서 춤을 출 때에 그 모양을 “자세히 본떠(審象)” 조각장이를 시켜 그대로 새겨 후대에 보였으므로 “상심(象審 : 본을 자세히 뜸)”이라고 하였다 한다. 혹은 또 상염무(霜髥舞 : 흰 수염 춤)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處龍郞望海寺)조>
포석정은 임금이 신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것이다. 경애왕 역시 꺼져 가는 신라 사직을 구하기 위해서 왕건에게 구원요청을 해놓고 포석정으로 와서 남산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때는 12월이었다. 경애왕(景哀王)은 이제 더 이상 버틸 능력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한 겨울에 포석정에 술잔을 띄워놓고 유상곡수연(流上曲水宴)을 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입수부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최근의 발굴 결과가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1999년 5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포석정 남쪽에 모형 전시관을 건립하기 위해 시굴작업을 벌여 이곳에서 ‘砲石(포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키와편을 수습하였다. 포석 명문기와와 함께 출토된 자른 기와들에 줄무늬, 혹은 비스듬한 격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포석’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의 제작 연대가 7세기 이전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명문의 글자가 鮑자 가 아니라 砲자인 것은 글자의 획수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이는 금석문에서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같은 사실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지난 89년과 95년 잇따라 발견된 화랑세기(花郞世紀)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祀), 혹은 줄여서 포사(鮑祀)라는 이름으로 진평왕(재위579~632)대에 등장하고 있고 사(祀)라는 글자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당 사(祀)자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던 곳이라는 종래의 학설과는 정반대로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사당터였다는 것이다. 또한 화랑세기의 기록을 통해 그동안 8세기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던 포석정이 삼국시대에도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포석정
진평대왕과 세종 전군이 친히 포석사로 나아가 크게... 그리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비로소 낭군이 되셨으니...의 귀함이 어찌 이러한 경사스런 일에 미치겠습니까" 라고 했다. 이에 윤궁이 이르기를 "첨의 몸은...이제 같은 골(骨)의 남편을 맞게 되었으니 결혼식을 해야 합니다. 어제 이전에 낭군은 첩의 신하였으므로 첩을 따른 것은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서 마땅히 낭군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라고 했다.
...중략...
포석사에 (문노의)화상을 모셨다. (김)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을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삼았다. 각간으로 추증하고 신궁 선단에서 대제를 올렸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 23년(606)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69세였다. (윤궁)낭주 또한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열살이 적었다.
<필사본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전>
태후는 이에 친히 신궁으로 가서 공주례(公主禮), 즉 공주가 되는 의식을 행하고 나서 포사에서 길례를 올렸다.
<필사본 화랑세기 12세 풍월주 보리공전>
포사에서 (춘추가 문희와) 길례를 올렸다.
<필사본 화랑세기 18세 풍월주 춘추공전>
포석사는 위업을 남긴 인물의 화상을 모시는 곳이었으며 길례를 행하는 장소였다. 길례란 좋은 일에 다르는 의식을 모두 말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말하는 것이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도 바로 포석정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이처럼 포석사가 이미 삼한통일 이전 신라에 있었으며 아주 중요한 곳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포석정 목욕터 추정지
▲포석정 우물
<2010.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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