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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월지ㆍ월지궁ㆍ임해전지

蔥叟 2010. 7. 11. 06:56

신라왕성과 부속시설 - 경주 월지월지궁임해전지

  

   동궁이자 왕과 귀족들의 연회장소이기도 했던 임해전과 월지는 신라시대의 왕궁터였던 월성 동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임해전의 확실한 모습은 오늘날 확인할 길이 없지만 1975년과 1976년 사이 발굴된 건물지로 그 형태를 추정할 뿐이다. 이때 출토된 다종 다량의 유물들은 통일신라 궁중 생활과 문화상의 일부를 밝히게 되었다. 월지(月池)의 명칭은 "동경잡기(東京雜記)"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김시습의 시에는 "안하지(安夏池)"로 표현돼 있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와서 등장한다. 왕궁터가 폐허가 된 채 오리 떼와 기러기 떼가 떠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임해전의 못이 조성된 뒤 700여년이 지난 뒤에야 "안압지"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월지

 

월지

 

월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태자궁인 동궁관(東宮官)에 속해있던 "월지악전(月池嶽典)"은 조경을 관장했던 곳이며 여기서 말하는 월지가 바로 안압지이다. 또 월지를 발굴할 때 "세택(洗宅)"이라 적힌 목간의 묵서가 나왔고 "용왕신심(龍王辛審)"이라 음각된 토기편이 출토됐는데 이들은 동궁관에 들어있는 세택, 월지전, 승방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의 관청명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안압지의 원명은 "월지"이며 "월지"는 동궁 안에 있는 연못으로 동궁은 월지궁으로도 불렀다. 학계에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므로 중국풍의 이름으로 적절치 않은 "안압지"라는 명칭 대신에 "월지"로 불러야 타당할 것 같다.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신라 문무왕 14년인 674년설과 동왕 19년인 679년 설이 있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전자인 674년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삼국사기의 기록방법과 출토유물을 고려할 때 679년설도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十四年 春二月 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14년(674) 봄2월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

 

○十九年 秋八月 創造東宮, 始定內外諸門額號.

19년(679) 가을8월 동궁을 짓고 궁궐 안 밖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전>

 

   출토 유물 중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679년)'銘의 기와와 '조로2년(調露二年·680)'銘의 연호가 새겨진 벽돌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공사가 679년에 시작되어 680년에 완료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경우 674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680년에 이르러 관련공사가 모두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출토유물과 문헌기록을 고려할 때 공사기간이 7년 정도 소요된 대규모의 토목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완공된 이후 임해전은 왕궁의 명모를 갖춘 채 통일신라 말까지 유지되었다.  

 

월지

  

월지

 

○六年, 秋九月, 宴群臣於<臨海殿>.

6년(697) 가을9월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효소왕전>

 

○十一年, 秋八月, 置東宮衙官.

11년(752) 가을8월 동궁아관을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전>

  

○五年, 春三月, 燕群臣於<臨海殿>.

5년(769) 봄3월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전>

 

○二年, 夏四月, 暴風折木蜚瓦, <瑞蘭殿>簾飛不知處, <臨海>, <仁化>二門壞.

2년(800) 여름 4월 폭풍으로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렸다. 서란전에 쳤던 발이 날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으며, 임해(臨海)ㆍ인화(仁化) 두 문이 파괴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성왕전>

 

○五年, 秋七月, 重修<臨海殿>, 新作東宮<萬壽房>.

5년(804) 가을7월 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東宮) 만수방(萬壽房)을 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애장왕전>

 

○十四年, 春正月, 以母弟<秀宗>爲副君, 入<月池宮>.

14년(822) 봄정월 동생 수종(秀宗)을 부군(副君ㆍ태자)로 삼고 월지궁(月池宮)으로 들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전>

 

○九年, 春二月, 重修<平議>․<臨海>二殿.

9년(847) 봄2월 평의전(平議殿)과 임해전(臨海殿)을 중수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전>

 

○四年, 秋九月, 王會群臣於<臨海殿>

4년(860) 가을9월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안왕전>

 

○七年, 春正月, 重修<臨海殿>.

7년(867) 봄정월 임해전을 중수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문왕전>

 

○七年, 春三月, 燕群臣於<臨海殿>, 酒酣, 上鼓琴, 左右各進歌詞, 極歡而罷.

 

7년(881) 봄 3월,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술기운의 오르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전>

 

헌강왕 7년(881) 여름 (지증대사가)선원사(禪院寺)에서 휴식하게 되자, 편안히 이틀 동안을 묵게 하고는 인도하여 월지궁(月池宮)에서 ‘심(心)’을 질문하였다. 그 때는 섬세한 조라(蔦蘿)에 바람이 불지 않고 온실수(溫室樹)에 바야흐로 밤이 될 무렵이었는데, 마침 달의 그림자가 맑은 못 가운데 똑바로 비친 것을 보고는, 대사가 고개를 숙여 유심히 살피다가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상쾌한 듯 흔연히 계합(契合)하고 말씀하시기를, “부처가 연꽃을 들어 뜻을 나타냈거니와, 전하는 유풍여류(遺風餘流)가 진실로 이에 합치되는구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제배(除拜)하여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월지

  

월지

 

   그러나 통일신라 말의 어지러웠던 상황과 맞물려 정강왕 이후에는 50여년 동안 관련기록이 보이지 많는다.마지막 왕인 경순왕대에 와서 고려 태조를 초빙하여 연회를 베푼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 기울어가는 천년 왕국 신라왕조의 마지막 모습을 잘 그려놓고 있어 애잔한 마음이 일어난다.

 

○五年, 春二月, <太祖>率五十餘騎, 至京畿通謁. 王與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於<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寖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 因泫然涕泣, 左右無不鳴咽, <太祖>亦流涕慰藉. 因留數旬廻駕,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 隨駕焉. <太祖>麾下軍士肅正,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

 

5년 봄 2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근방에 와서 왕을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은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 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종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전>

 

   이 밖에도 월지과 관련된 직관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東宮官

동궁관(태자궁)

 

○東宮衙. 景德王十一年置. 上大舍一人. 次大舍一人

동궁아는 경덕왕11년에 설치하였다. 상대사(上大舍, 12관등) 1명과 차대사(次大舍) 1명이다.

 

○洗宅 大舍四人. 從舍知二人

세택(오늘의 비서실).  대사4명과 종사지 2명이다.

 

月池典 官員數闕

월지전은 관원수에 관한 기록이 빠졌다.

 

○僧房典. 大舍二人. 從舍知二人.

승방전은 대사2명, 종사지2명이다.

 

○月池嶽典. 大舍二人. 水主一人.

월지악전(월지의 조경과 관리를 담당했던 부서로 추정)은 대사 2명과 수주 1명이다.

 

○龍王典. 大舍二人. 史二人

용왕전(용왕에 대한 제사 등을 담당)은 대사 2명과 사2명이다.

 

<삼국사기 잡지제8 직관조 中>

 

월지

 

월지

 

   한시대의 영화를 직접 보고 겪었던 월지는 고려가 후삼국 통일한 후에는 권력과 사람이 개성으로 이동하면서 돌보는 이 없이 서서히 퇴락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雁鴨池在天柱寺北, 文武王於宮內爲池, 積石爲山象巫山十二峯, 種花卉養珍禽, 其西有臨海殿其礎砌猶在田畝間.

안압지는 천주사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 12봉을 상징하여 화초를 심고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춧돌과 섬돌만이 밭이란 사이에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

 

○雁鴨池在天柱寺北,  文武王於宮內爲池, 積石爲山象巫山十二峯, 種花卉養珍禽, 其西有臨海殿, 不知創於何時, 哀莊王五年甲申重修, 其礎砌猶在田畝間 

안압지는 천주사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 12봉을 상징하여 화초를 심고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었는데, 언제 창건했는지 모르나 애장왕 5년(804) 갑신에 중수되었다. 지금은 주춧돌과 섬돌만이 밭이란 사이에 남아있다.

 

<동경잡기>

 

鑿池爲海長魚螺, 引水龍喉岌峩, 此是新羅亡國事, 而今春水長嘉禾.

못을 파서 바다로 만들고 고기와 소라를 길렀는데, 물을 끌던 용의 목은 그 형세 우뚝도 하여라, 이는 신라 망국의 일이건만 지금 봄 물은 좋은 벼를 기르는구나.

 

<김시습 안하지구지(安夏池舊址)>

 

○十二峯低玉殿荒, 碧池依舊雁聲長, 莫尋天柱燒香處, 野草량(疒+良)深內佛堂.

(안압지)열두 봉우리 낮아졌고 아름다운 전각도 황폐해졌는데 푸른 못은 옛날같고 기러기는 길게 누는구나. 천주사 분향한 곳 찾지를 말 것이 들풀에 깊이 묻힌 내불당 자취.

 

<강위(姜瑋)의 시>

 

   조선 초기에 매월당 김시습이 찾았을 때에는 부평초가 떠 있는 물위로 기러기와 오리 때가 한가로이 오가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1669년 경주부사 민주면이 편찬한 동경잡기에는 경주향교를 중수하면서 안압지의 초석과 장대석을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27동의 건물이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안압지는 폐허가 되기 시작하였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월지

 

월지

 

   삼국통일전쟁을 수행하던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궁성을 직접 보고 통일왕조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단행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장인(匠人)들을 비롯한 인력들을 활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월지에는 백제의 조경사상이나 토목기술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안압지 조영의 마스터플랜은 백제식으로 짜여졌고, 세부적 계획은 고구려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백제적인 요소를 살펴보면 조경사상이다. 연못을 파서 신선사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백제의 정림사, 궁남지, 미륵사지 등에도 연못이 있다. 즉 월지의 전체계획은 백제식이었다. 백제는 진사왕 7년(391), 무왕 55년(634), 의자왕 15년(655)에 중국의 영향아래 연못을 만들었다. 다음 고구려적 요소를 살펴보면 호안 석축의 기운 정도가 거의 수직인 점, 호안 석축 축조방법으로 산의 돌과 가공석을 동시에 쓴 점, 돌의 규모가 크다는 점 연못바닥에 돌을 고르게 깔았던 점, 물의 정화를 위해 입수부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 점, 호안 석축 전방에 일정한 간격으로 괴임돌을 놓은 점 등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중국, 고구려, 백제 등의 문화를 흡수하여 신라 특유의 독특한 문화를 재창조한 것이 월지와 임해전이다.

 

월지

 

월지

 

 

 

<2010.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