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서쪽을 향한 높은 암벽에 조각된 불신 위에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올린 특이한 형태의 마애불로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불두는 큼직한 육계가 표현된 소발의 머리와 얼굴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서 조립하였는데 미끈한 얼굴의 질감과는 달리 거칠게 머리를 이마 위에 얹어 놓아 멀리서 보더라도 뚜렷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풍만한 얼굴의 미간에는 백호를 큼직하게 돋을새김하고,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위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깊게 파인 눈썹이 날카롭게 우뚝 솟은 코의 윤곽선에 이어져 있다.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붉게 채색된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 강한 윤곽으로 표현된 얼굴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삼도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을 돋을새김한 장식이 표현되었으며, 강한 각선으로 조각된 환조의 머리와는 달리 장대한 신체는 선각으로 처리하여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 통견의 법의의 왼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옷주름이 오른족에서 수직으로 드리워진 법의 자락과 교차되어 접히고, 넓게 트인 가슴 밑으로 내의의 띠가 수평으로 표현되었다.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수인은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은 복부에 대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도록 가슴 위로 올려 아미타구품인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의 발 밑에는 큼직한 단판연화문을 음각하여 대좌로 삼고 있다. 불두를 다로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경주 남산의 약수골 마애대불에서 처음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한 형식이며,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양식으로 볼 때 11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이 불상은 원래 연미사(燕尾寺)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위치하며 근래에 제비원이라는 암자가 새로 들어서 일명 '제비원 석불' 이라고도 불리는 마애석불이다. 제비원은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도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던 원이엇다. 원이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을 말한다. 제비원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이곳에서 심부름을 하던 연(燕)이라는 처녀가 잇었다. 인물도 곱고 마음도 착하며 불심 또한 깊어 이웃의 총각 뿐 아니라 지나가는 과객들 또한 연이를 사모하였고 고운 마음씨에 탄복했다.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이웃마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집은 부유했지만 마음씨는 나빠 다른 사람을 도울 줄 몰랐다. 이 집의 총가도 연이를 사모했는데,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은 총각이 살아 생전에 악덕을 많이 쌓았으므로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인데, 건너마을의 연이는 착한 일을 하여 선행의 창고가 가득 쌓여 있으니 좀 꿔서 쓰면 다시 살아돌아갈 수가 있다고 하였다. 저승에서 연이의 재물을 빌려 살아난 총각은 이승에 돌아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의 제물을 나눠주었다. 큰 재물을 얻게 된 연이는 이를 모두 부처님을 위하여 쓰기로 하고 법당을 지었다.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이천동 마애석불입상
큰 법당을 짓느라 5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마지막날 기와를 덮던 와공이 발을 헛디뎌 지붕에서 떨어져 몸이 마치 기왓장처럼 산산조각이 났는데, 그 순간 와공의 혼이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고 이 일대를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연이는 서른여덟이 되던 해 동짓달 스무사흗날에 죽었는데, 그날 저녁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큰 바위가 두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연이의 혼이 이 돌부처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상호
<2010.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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