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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백월산(白月山)

蔥叟 2010. 3. 25. 05:56

창원 백월산(白月山)

      

   백월산(白月山·428m)은 그리 높지 않지만 서기(瑞氣·상서로운 기운)를 뿜어내는 신비로운 전설과 역사의 향기가 감도는 유서 깊은 명산이다. 백월산은 세 개의 큰 봉우리가 있어 일명 ‘삼산’이라고도 하고, 삼산 동쪽 끝 봉우리의 커다란 바위 형세가 사자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사자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백월산의 당나라 궁궐 연못 전설과 ‘노힐부득·달달박박’ 두 승려의 득도 이야기는 창원 최초의 불교 성지인 백월산 남사를 탄생하게 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

 

   옛날 당나라 황궁 안 아름다운 연못에 매월 보름날이면 사자처럼 생긴 바위산 형상이 비쳤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황제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자 형상을 한 산봉우리를 찾을 수가 없었고 화공에게 그 모습을 그리게 했다. 황제는 그 산을 찾도록 했고 사자는 해동(海東)에 이르러 그림 속의 산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사자 바위 꼭대기에 신발 한짝을 걸어 놓고 돌아와 황제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보름이 되자 연못 속에 바위산이 비쳤는데 바위 위에 걸린 신발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에 감탄한 황제가 그 산을 보름달과 같이 연못 속에 하얗게 비친다 하여 ‘백월산’이라 부르게 하고, 정상의 기암석 세 개는 사자가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 형상을 하고 있어 사자암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신라 경덕왕(764년) 때 세워진 백월산 남사에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승려의 득도에 관한 이야기가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백월산

 

   백월산 양성 성도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백월산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그산 줄기는 수백리에 연무(산맥이 남북으로 뻗어있는 모양)하니 참으로 큰 진산이다.' 옛 노인들은 서로 전해 말했다.


   '옛날에 당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팟는데, 매월 보름 전이면 달 빛이 밝 으며, 못가운데는 산이 하나 있는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하게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에게 명하여 그 모양을 그려 사자를 보내 천하를 돌며 찾게 했다. 그 사자가 해동에 이르러 이 산을 보니 큰 사자암이 있고 산 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이 화산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 다. 그러나 그 산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므로 신발 한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발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의 이름을 백월산이라고 햇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가운데 나타났던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이 산의 동남쪽 3천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이 있고,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 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 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미 승이었다. 또 한사람은 달달박박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이라고 불렀고, 어머니는 범마라 했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으며 역외하상(域外遐想-속세를 초월한  높은 사상)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생의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절이름)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얼마 후 서남쪽의 치산촌 법종곡 승도촌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정신을 수련함)할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과 소불전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은 회진암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 을 양사라고도 했다. 모두 처자를 거느리고 와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였으며, 서로 왕 래하며 정신을 수양하여 방외지지(方外之志-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 방외는 세상밖) 를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으나, 의식이 생각대로 생기고 저절로 배부 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한 부녀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 藏-비로사나불이 있는 功德無量 廣大莊嚴의 세계)에서 여러 부처나 앵무새 공작새와 함께 놀며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불도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필연코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이제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여 있는 것을 벗어버리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터 인데, 이 풍진속에 파묻혀서 세속 무리들과 함께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떠나 장차 깊은 산골에 숨으려 했다. 그런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 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이야기하니 두 사람이 똑같은 꿈을 꾼지라 이들은 모두 오랫동안 감탄하더니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 갔다. 박박사는 북쪽 고개 에 있는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자집 8자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이라고 하고, 부득 사는 동쪽 고개의 돌 무더기 아래 물이 있는 곳에서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 방이라 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미륵불을 성심껏 구했으며, 박박은  미타불(아미타불)을 경례 염송(念誦)했다.

 
   3년이 채 못되어 경룡 3년 기유(709) 4월 8일은 성덕왕 즉위 8년이다. 바야흐로 날은 저무는데 나이 20세에 가까운 한 낭자가 매우 아름다운 얼굴에 난초와 사향의 향 기를 풍기면서 문득 북암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며 그녀는 글을 지어 바쳤다.
  
   갈 길은 아득한데 해지니 온 산이 저물고, 길 막히고 성은 먼데 사바이 고요하네.
   오늘 밤 이 암자에 자려 하오니, 자비하신 스님이시여 노하지 마오.

 

   박박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이곳에서 지체하지 말고, 어서 다른 데로 가보시오"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낭자는 남암으로 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자 부득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담연(湛然-정적의 경지, 즉 우주의 근원)함이 태허(太虛-역시 우주의 근원)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비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들었기로 장차 도와서 보리를 이루고자 해서일 따름입니다." 그리고는 게(偈-불교에서 가요 성가등을 말함) 하나를 주었다.

 

   깊은 산길 해는 저문데 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松竹의 그늘은 한층 그윽하고, 골짜기의 시냇물 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갈 곳을 찾음이 아니라, 尊師의 뜻 인도하려 함일세.
   부디 나의 청만 들어 주시고, 길손이 누군지는 묻지를 마오.

 

   부득사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 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름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이오. 더욱이 깊은 산골에서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도록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가라앉 히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날이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도 마침 산고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들고서 은근히 대했다.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으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 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하였다.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는데 잠시  후에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풍기면서 그 물이 금액(金液)으로 변했다. 이에 부득은 크게 놀라니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못해 부득이 그 말에 좇았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짐을 느끼게 되고 피부가 금빛으로 변했다. 그 옆을 보니 문득 연대(蓮臺)가 있었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며 말했다.


   "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은 생각했다.


   '부득이 지난밤에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므로 가서 비웃어 주리라.' 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금빛으로 단장된 몸에서 는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주자 박박은 탄식하며 말했다.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불행히도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만나지 못 한 것이 되었습니다. 큰 덕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군요.


   "부디 지난 날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나도 함께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말하자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이 같이 무량수를 이루니 두 부처가 엄연 히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다투어 달려와 우러러 보며 감탄하였다.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지를 설명하고는 온 몸이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천보 14년 을미(755) 신라 경덕왕이 즉위하여 이 일을 듣고 정유(757)에 사자를 보내어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라 했다. 광덕 2년 갑진(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므로, 다시 미륵존상을 만들어 당금에 모시고 액자를 <현신성도미륵지전> 이라했다. 또 아마타불상을 만들어 강당에 모셨다. 그러나 남은 금액이 모자라 몸에 골고루 바르지 못한 탓으로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에는 <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 했다.

 

▲백월산

 
   논해 말한다.


   '낭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 섭화(攝化-중생을 자비심을 가지고 보호하여 교화함) 하였다 할만하다. 화엄경이 마야부인 선지식(善知識-부처님의 교법)이 십일지(十一地 - 十地와 等覺을 말함.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位중 41위로부터 50위까지를 십지라 한다. 이 10위는 佛智를 생성하고 능히 住持하여 흔들리지 않고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되게 함이 땅이 만물을 낳고 키움과 같아서 地라고 한다. 등각은 보살이 수 행하는 순서로서 그 지혜가 부처님과 거의 같으므로 등각이라 한다. 여기서는 보살을 마야부인과 비교하고 있다.)에 살며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환은 여 러 방법으로 코끼리 말 인물등을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살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느끼 게 하는 것.)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각산(順産)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녀가 준 글은 슬프고 간곡하며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之趣)가 있다. 아, 만일 낭자 가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를해득할 줄 몰랐다면 과연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그 글 의 끝에는 당연히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오.>라고 했어야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은 대개 세속의 말처럼 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기리어 읊는다.

 

   푸른 빛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드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그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느뇨.
   남암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 내 앞의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오.

 

   이것은 북암을 기린 글이다.

 

   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 南窓 빈 자리에 머물고 가오.
   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드려워라.

 

   이것은 남암을 기린 것이다.

 

   솔그늘 10리를 한 길로 헤매다가 밤되어 招提(중들을 쉬게 만든 절)로 중앙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 날 새려 할 때, 두 아이 낳아 두고 서쪽으로 갔네.

 

   위의 성랑(聖娘)을 기린 것이다.

 

<삼국유사 남백월이성달달박박노힐부득조>

 

 

 

<2010.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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