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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봉림사터 삼층석탑

蔥叟 2010. 3. 20. 10:18

창원 봉림사터 삼층석탑

      

   봉림사터 삼층석탑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문의 터전이었던 봉림사터에 있던 탑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목적으로 부산으로 팔려갔다가 다시 봉림사터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 이후로 돌보지 않아 많이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0년 창원교육청에서 상북초등학교로 옮겨 세웠다. 이 탑은 원래 이중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여러 차례 옮겨다니면서 일부가 유실되고 많이 깨져나가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게 내려온다.

  

봉림사터 삼층석탑

  

   없어진 기단 일부와 2,3층의 몸돌 및 상륜부는 후에 복원한 것으로 원래의 재질과 조각 수법에 있어 차이가 있다. 이처럼 불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지만 탑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봉림사 창건 당시에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조금 후대인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특히 2층 몸돌에는 새로운 석재로 보충하면서 4면에 문비를 조각해 놓았는데 그 모양이 다소 어색하다. 아마도 석공이 우주를 조각한다는 것을 잘못 알고 문비 모양으로 새긴 것 처럼 보인다.석탑 옆에는 상륜부의 일부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남아있으나 크기로 보아 봉림사 석탑에 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이 서 있었던 봉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봉림산문의 개창지이다. 심희(審希, 854~923)스님이 진성여왕 8년(894) 이곳에 산문을 열고 선풍을 진작했다. 고려 광종 대에 이르기까지 번성하던 사찰은 조선시대에 들어 폐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봉림사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탑비 그리고 삼층석탑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때 뿔뿔이 흩어져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탑비는 1919년 반출돼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2층 탑신 문비

 

   봉림사는 원감 현욱(圓監 玄昱)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역사상 밝히기가 어려우며 진경 심희(眞鏡 審希) 스님이 효공왕 때 창건하여 그의 스승인 현욱스님을 개산조로 추앙한 것으로 보인다. 봉림사지 인근의 불곡사도 진경스님 창건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당시 경남지역에 미친 진경스님의 영향은 매우 컸음을 알려주고 있다. 진경스님과 그의 제자인 찬유스님의 문하에 각각 5백명의 수행자가 있었다. 그러나 봉림사의 폐사된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개산조 진경 심희스님은 9세에 현욱선사의 제자로 출가하였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심등(心燈)을 이으라는 스승의 당부를 받들어 전국의 명산을 순례하며 수행했다. 수행 중 도를 구하고자 하는 학인이 모여들자 경남 창원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선풍을 크게 선양했다. 한때 경명왕의 청을 받아들여 궁궐에 들어가 설법을 했으며, 이때 왕은 심희스님에게 법응대사(法應大師)라는 존호를 내렸다. 그 뒤 스님은 봉림사로 돌아와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923년에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찬유, 경징, 융제를 비롯해 5백여명에 이르렀다.

 

▲상륜부 석재

 

 

 

<2010.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