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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순례 - 여주 세종 영릉(英陵)

蔥叟 2010. 2. 2. 06:19

조선왕릉 순례 - 여주 세종 영릉(英陵)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능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가 죽은 1446년(세종 28) 광주(廣州)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죽자 합장했다. 이 능은 <국조오례의 國祖五禮儀〉 치장조(治葬條)를 따른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石物)은 병석(屛石)에서 영저(靈杵)·영탁(靈鐸)·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문양과 12지신상만 조각해 조선병석문(朝鮮屛石紋)의 기본을 확정했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영릉(英陵)

  

영릉(英陵)

   

▲정자각

  

   세조 때 이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했으나 서거정(徐居正)이 "천장(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했을 뿐 상설제도는 단릉(單陵)과 같다. 광릉(光陵)에는 동자석주(童子石柱)에 12지신상을 표시했는데 이보다 1년 후에 천릉한 영릉에서는 12지(支)를 문자로 기록했고, 그 이후에는 난간에 24방위까지 넣은 새로운 왕릉상설제도를 이루었다. 광주에 세워졌던 신도비(神道碑)는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옮겨놓았다.

 

   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은 22세에 즉위, 이후 31년간(1418∼1450) 재위하면서 실로 많은 업적을 쌓아 태조 이성계와 선왕인 태종에 이어 조선 초기 3대성군으로 꼽힌다. 한글의 창시를 비롯해, 측우기 등 과학기기의 발명, 아악의 정립, 팔도지리지의 발간과 고려사 편찬, 그리고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는 등 건국 초기 나라의 기초를 정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여 대왕으로 칭송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봉분

  

▲장명등

 

▲문인석

 

   그가 묻혀있는 영릉(英陵) 역시 태조의 건원릉(동구릉의 원능)과 함께 조선 왕실의 손꼽히는 명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여주벌의 젖줄과도 같은 남한강 물줄기가 둘러있고, 나지막하게 야산들이 산군을 이루며 넓은 여주벌을 장식해 성군의 능역 다운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능은 주산인 북성산의 정남향으로 앉았고 좌청룡 우백호가 확실하며 노송 아래로 넓은 잔디밭과 송림 사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3㎞나 되어 주말 나들이를 겸한 산책길로도 아낌을 받는다. 1975년 성역으로 지정, 더욱 잘 가꾸 어진 경관은 넓은 잔디와 무성한 노송림이 일품이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전형적인 명당이다.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인 영릉의 구조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그 좌우 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게 된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문인석

  

▲재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씩 여덟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2010.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