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외암리 참판댁
외암리 ’참판댁’ 은 조선 말기에 참판 벼슬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지은 집이어서 이름이 그리 붙었다고 한다. 외암마을로는 동쪽에 자리잡은 이 집은 동남향한 큰 집과 서남향한 작은 집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따로 곽을 두어 독립성을 지니면서도 서로 이웃하여 하나의 구역을 형성해서 일가가 서로 기대어 사는 따뜻한 모습의 본보기가 된다. 큰집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대문채 앞쪽으로 부러 돌담을 내쌓아 집앞이 휑하니 비지 않고 고샅처럼 공간을 연출한 모습이 퍽 재미있다. 옛 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외암리 마을에서 중요민속자료 지정된 집은 건재고택과 외암리 참판댁 뿐이다. 그 만큼 참판댁의 건축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뜻이다.
▲문간채
▲사랑채
이 참판댁은 대한제국의 종 2품 참판 직에 해당하는 시종부 부경 등을 역임한 이정렬공이 공직을 사퇴한 후 고종황제의 하사금으로 지은 집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이 집을 참판댁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사랑채에는 '高宗皇帝 賜號 <退湖居士> 英王九歲書'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즉 고종황제가 호를 내리고 영왕이 9살(1905년)에 쓴 것이다. 이로부터 퇴호退湖를 이정렬공의 호로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이정렬공은 고종황제가 직접 호를 내릴 정도로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지는 모르지만 이 집을 고종황제의 하사금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집주인의 증언이 120-30년 된 것이라고 하고 실제로 고종황제의 하사금으로 지었는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것 같다.
이 집의 권위를 보여주는 높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는 대문정면에서 좌측으로 빗겨 위치해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의 배치는 평행이 아니어서 들어서는 사람은 오히려 중문 쪽으로 시선이 가게 되고 반면에 사랑채에서는 행랑채를 쉽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배치를 이렇게 한 것은 사랑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도 적절하게 출입자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행랑채는 다른 곳과는 달리 퇴칸을 두었는데 이러한 구조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행랑채의 활용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주인의 말에 의하면 퇴칸 중 동측 한 칸이 마구간으로 쓰였다고 한다. 반 칸의 마굿간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로서 겨우 말 한 마리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이다. 이렇게 마구간을 만든 것은 필요한 면적을 최소로 할당하여 집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전퇴집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좌측으로부터 방, 대청이 각 한 칸씩 있고, 다음으로 두 칸의 큰사랑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마지막 한 칸이 다락과 부엌으로 되어있다. 맨 오른쪽 칸의 전면 퇴칸 부분은 머릿방으로 몸종이 기거하는 방이다. 집의 위상에 비하여 사랑채의 대청의 규모가 조금 작다는 것 외에는 기단의 높이도 적절하여 차분하고 안정감을 준다. 참판댁 사랑채의 기단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기단에 있는 굴뚝이다. 암키와 두 장을 겹쳐 만든 구멍이 전면 사랑마당을 향해서 두 곳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연기를 빼는 굴뚝은 안마당 쪽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이 굴뚝은 벌레를 쫓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안채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굴뚝을 막고 불을 때면 이곳으로 연기가 나와 벌레를 쫓아 준다고 한다. 한번 불을 때 연기를 내면 2-3일 동안 벌레가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낮게 설치된 굴뚝은 주로 따뜻한 남부지방과 같이 기후가 온화하여 불이 잘 들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형식이지만 중부이북지방에서는 그리 쉽게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이 외암리 마을에서는 건재고택의 사랑채의 굴뚝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건재고택의 사랑채에는 높은 굴뚝이 아예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굴뚝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목적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안채
▲안채
또한 기단에는 돌로 만든 조그마한 수반이 있다. 사랑채 어른이 세수를 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더운 여름 바깥어른이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 간단하게 땀을 닦을 수 있도록 수반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물이 지저분하지만 예전에 몸종이 있을 때는 몸종이 늘 닦아 깨끗하게 유지되었다고 한다. 또한 수반 바로 앞의 기둥에는 세수하고 물을 닦을 수 있도록 베 수건이 늘 걸려있었다고 한다.
큰 사랑방 앞 창문 위쪽에는 자그마한 창이 뚫려져있다. 별도로 창호지도 바르지 않았다. 환기용이라고 한다. 원래는 내부에도 상방 위로 환기를 위하여 구멍을 뚫어 놓았었는데 겨울에 너무 찬바람이 들이쳐 내부의 것은 최근에 막아버렸다고 한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한 겨울에는 조그마한 틈 사이로도 찬바람이 들이치니 현재 뚫려져 있는 정도이면 겨울에는 만만치 않게 찬바람이 들이쳤을 것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랑채 우측에 있는 중문을 통해야 한다. 중문은 사랑채와 직각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안채를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중문 앞쪽으로는 별도로 문이 설치되어 있다. 예전에는 현재와 같은 문은 아니었고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정도로 담이 트여 있어 중문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통로의 설치는 동네 아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도 편하게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한 배려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안채는 사랑채와 광채와 더불어 튼 ㅁ자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 형태인데 좌측 부분은 남쪽으로부터 부엌 2칸, 안방, 윗방,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2칸 대청 건너편에 칸반 크기의 건넌방이 있다. 이 건넌방 옆에 반 칸의 부엌이 있고 그 옆에 방이 또 한 칸 설치되어 있다. 건넌방과 옆방이 연속되어 설치되지 않고 사이에 반 칸의 부엌이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것은 가운데 부엌에 양쪽 방의 아궁이를 설치해 난방을 하기 위함이다. 또한 대청의 판장문 상부에는 벽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당이 지어지기 전에 위패를 모시기 위한 장소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곳간채
▲쪽문
이 집의 사당은 일반적이 위치와 다른 안채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은 정침의 동쪽 즉 안채를 바라볼 때 우측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배치는 주자가례에서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집은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그 것은 아마도 현재의 우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집을 지을 때 수맥를 찾아 우물을 찾고 보니 사당의 설치될 자리에 우물이 차지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사당이 반대쪽으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한다. 사당은 한 칸 규모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곳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사당들과는 달리 뒷벽을 외부로 돌출시켜 감실을 만들고 그 곳에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사당에서 외부로 돌출시켜 감실을 만드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실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2009.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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