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맹씨행단(孟氏杏亶)
온양(溫陽)읍에서 보면 동남쪽으로 차령산맥이 뻗어 있다. 이 산맥의 한 줄기가 내려오다 큰 산봉우리를 이루는데 이산을 설화산(雪華山) 또는 배방산(排方山)이라 부른다. 또한 촛불같이 뾰족한 산봉우리가 다섯이 솟아있어 오봉산(五峯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산의 맥이 북쪽으로 굽이쳐 내려오다가 평평한 지형을 이루는데 단정한 좌청룡(左靑龍)의 지세와 웅장한 우백호(右白虎)의 지세가 명당(明堂)을 호위하고 있는 풍수상 길지(吉地)에 맹씨행단이 터를 잡고 있다.
▲맹씨행단(孟氏杏亶)
▲맹씨행단(孟氏杏亶)
▲맹씨행단(孟氏杏亶)
맹씨행단은 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孟思誠, 1360∼1438)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맹사성은 고려말 · 조선초의 문신으로, 최영 장군의 손주사위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등을 지내고 조선 태조 때에는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대제학, 우의정의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맹사성은 황희(黃喜), 허주(許周)와 더불어 이 집 후원에 괴목(槐木) 9주를 심어 구괴정(九槐亭)이라 하고 그 터를 삼상평(三相坪)이라 하였다.
▲맹씨행단(孟氏杏亶)
▲맹씨행단(孟氏杏亶)
▲맹씨행단(孟氏杏亶)
맹씨행단은 우리나라 민가(民家)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하나로 이 집을 통해 조선초기 민가조원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어서 행단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하나, 공부하던 자리의 의미인 행단이 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란 뜻이다. 집 마당가에는 단(壇)을 만들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현재 마당가에는 600년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다.
▲맹씨행단(孟氏杏亶)
▲맹씨행단(孟氏杏亶)
▲맹씨행단(孟氏杏亶)
좁은 개울이 집 앞을 흐르고 이를 지나 돌계단을 올라 정면 7칸의 문간채가 있는데 문간채의 대문칸은 솟을 지붕이다. 문간채 좌우로 길게 돌담이 둘러쳐 있으며 문간채 안에는 안채가 있다. 안채 우측에는 높이 5자의 석축단이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면 '工'자형 맞배지붕의 본채 건물이 서 있다. 본체는 자연석으로 조성한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건물로 중앙 2칸이 대청이고 양측칸이 온돌방이다. 고택 뒤에는 높은 곳에 단을 지우고 가묘(家廟)인 세덕사를 배치하였다.세덕사에는 맹 정승과 그의 부친인 희도, 조부 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집 경역은 2,300여평으로 자연석 담을 둘렀으며 후원은 느티나무, 전나무, 감나무 등이 넓은 원림(園林)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 개울가에도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의 원림이 조성되어 있다. 담장내 마당가에는 채소밭도 조성되어 있다.
▲맹씨행단(孟氏杏亶)
▲세덕사
▲문간채
맹씨행단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 2월 무민공(武愍公)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崔元直)이 건축하였다고 전하며, 실제 무민공이 거쳐하였던 집이다. 우왕 14년(1388)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따른 정란으로 무민공이 죽음을 당하여, 비어 있던 집에 맹사성(孟思成, 최영 손서)의 아버지 맹희도(孟希道) 동포공이 정란을 피하여 한산을 거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였다. 성종 13년(1482), 인조 20년(1642), 순조 4년(1814), 그리고 1929년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고택 가구부에 남아있는 고부재와 창호 등이, 견실한 고법을 간직한 고려시대의 귀중한 건축물이다. 건평은 90.71㎡(27.5평)이다.
▲석축
▲석축단
▲맹씨행단 배치도
▲맹씨행단 복원모형
<2009. 12. 27>
'◈한국문화순례◈ > 내포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산 외암리 교수댁 (0) | 2010.01.28 |
---|---|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0) | 2010.01.27 |
아산 온주아문(溫州衙門) (0) | 2010.01.26 |
아산 읍내리 당간지주 (0) | 2010.01.26 |
서산 마애삼존불입상 (0) | 2008.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