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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용두사터 철당간

蔥叟 2010. 1. 6. 08:10

청주 용두사터 철당간

    

   청주 용두사지에는 절 입구나 법당 앞에 깃발이나 불교그림을 거는 철당간이 남아있다. 당간은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남은 당간 전체의 높이는 12.7m이다. 원래 건립한 당간이 남아 있는 드문 예로서 현재 원 위치에 보존되어 있는데 30단 중 현재 20단이 남아 있다. 당간의 셋째단 둘레에 명문이 남아있어 철당간의 역사를 온전히 알 수 있다. 당간의 둘레에 24줄로 새긴 글자의 크기는 2cm 정도이다.


   김원(金遠)이 짓고 해서로 써서 손석(孫錫)이 새겨 962년(고려 광종 13)에 세웠다. 내용은 당간의 의미를 설명하고 지역 호족인 김예종(金芮宗)이 병이 들어 당간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죽고 그 종형인, 역시 지역 호족인 김희일(金希一)이 만들었음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사(詞)에 이어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시주 명단을 열거하고 건립일을 명기하였다. 시주들이 지방 유력자들로 구성되어 향리직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광종의 연호인 준풍(峻豊)을 명기하였다.

 

▲용두사터 철당간

 

<판독문>


龍頭寺幢竿記

              前翰林學生金遠撰兼書 鐫者孫錫

早聆幢竿所製餝佛門之玉樓播盖由來

粧寶殿之神旆其猶也鶴翔碧空龍躍

下霄立之者旁發信心望之者心傾丹

愿固知伏魔鐵杖挫賊霓旌頃有堂大

等金芮宗者也州里豪族鄕閭冠族偶因染

疾忽約

佛天仰祈則敬造鐵幢俯擔則莊嚴玉刹然而

難停逝水易沒黃泉已間數歲遲延隔時

容易於時從兄堂大等正朝賜丹銀魚袋

金介一等彼爲還願此繼頹繹令鑄

成三十段之鐵筒連立六十尺之幢柱穿雲

捧日貫霧倚空魯氏雲梯難攀龍盖甘

寧錦纜永敞璅繩可謂奉仁心深典亡情切

植金剛之不朽營玉刹之無窮僕者膠柱頑

流剋舟膚物忽蒙勸我聊表短章其詞曰

幢竿始立天半可壓巧成物像莊嚴佛法兄

弟兩家令脩善業鑄之植之无窮永劫

當寺令釋紬大德 檀越兼令金希一正朝金守▲

金釋同釋希▲ 金寬謙大等監司上和尙信學▲▲

前侍郎孫熙 前兵部卿慶柱洪大學院卿韓明

寔柰前司倉慶 奇俊大舍學院郎中孫仁謙鑄▲▲大

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

 

▲철당간

  

▲철당간

 

<해석문>

 

용두사(龍頭寺) 철당간기(鐵幢竿記)


전 한림학생(翰林學生) 김원(金遠)이 짓고 아울러 썼으며 새긴 이는 손석(孫錫)이다.


일찍이 듣건대 당간(幢竿 :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을 매다는 것으로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 사찰이나 법당 앞에 세움)이 만들어진 바는 불문(佛門)을 꾸미는 옥같은 표지이며 번개(幡盖 : 깃발로서 불보살의 위덕을 나타내는 장엄 도구)의 유래는 법당을 장엄하는 신령스런 깃발이라 하였다. 그 모양은 학이 푸른 창공을 날아 오르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쳐 오르는 것과 같다. 세운 사람은 크게 신심(信心)을 일으키고 바라보는 사람은 반드시 충정의 정성을 기울일 것이니 진실로 마귀를 항복받는 쇠지팡이요 도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임을 알겠다.


근래에 당대등(堂大等 : 고려 향리 중의 최고위 직함. 983년에 戶長으로 바뀜) 김예종(金芮宗)이라는 이가 있으니 고을의 큰 가문이요 지방의 손꼽히는 집안이다. 우연히 병에 걸려 문득 부처와 하늘에 약속하기를, 우러러 철당간을 삼가 만들기를 빌고, 엎드려 훌륭한 사찰을 장엄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기 어렵고 죽음에 빠지기는 쉬워 그 사이에 몇 년이 늦어지고 때는 쉽게 멀어졌다. 이때에 종형인 당대등 김희일(金希一) 등이 저쪽에서 돌이킨 서원이 되게 하고 이쪽에서 끊어진 인연을 이어 마침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의 당주(幢柱)를 세웠다.


구름을 뚫고 해를 받들고 안개를 관통하여 공중에 기대어, 노반(盧班 : 수레에 사다리를 달아 성을 공격하는 도구를 만든 사람)의 사다리로도 용개(龍盖)에 오르기 어렵고 감녕(甘寧 : 오나라 사람으로 호사를 즐겨 비단으로 배를 묶음)의 비단 밧줄로도 옥돌줄을 당하기 어렵겠다. 죽은 이를 받드는 마음이 깊고 망한 이를 일으키는 정이 간절하여, 금강의 썩지 않음을 심고 옥찰(玉刹)의 무궁함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아교처럼 완고한 사람으로 어리석고 천박한데 문득 나에게 권유함을 입게 되어 겨우 짧은 글을 나타낸다. 사(詞)에 이르기를,


당간이 처음 서서 하늘 가운데에 미치니

공교롭게 물건의 모양을 이루어 불법을 장엄하도다

형제간의 두 집이 합쳐 선업을 닦아

주조하고 세우니 영겁토록 무궁하리라

 

▲당간지주

  

▲명문

  

이 절(용두사)의 영(令)은 석주(釋紬) 대덕(大德)

단월(檀越) 겸 영(令)은 김희일(金希一) 정조(正朝), 김수▲(金守▲), 김석희(金釋希) 대등(大等 : 고려 향리의 유력자 직임으로 당대등에 이은 둘째 직책. 성종 때 副戶長으로 이름이 바뀜), 김관겸(金寬謙)

감사(監司)는 상화상(上和尙) 신학(信學), ▲▲, 전시랑(前侍郎) 손희(孫熙) 대등, 전병부경(前兵部卿) 경주흥(慶柱洪) 대등, 학원경(學院卿) 한명식(韓明寔) 나말(柰末 : 나마(奈麻), 신라의 17관등의 11관등), 전사창(前司倉) 경기준(慶奇俊) 대사(大舍 : 신라 17관등의 12관등), 학원낭중(學院郎中) 손인겸(孫仁謙)

주대▲▲(鑄大▲▲)

준풍(峻豊 : 고려 광종의 연호, 960~963) 3년(962, 광종 13) 임술년 2월 29일에 주조하여 완성함.

 

『향토문화대전』에는 이 철당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전하고 있다. 팔도를 순례하던 연등사 주지 혜원이 청주 고을을 지나다가 하룻밤 쉬어가게 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일렀다. “용두사에 들어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워라.” 아침에 일어나 급히 용두사 주지스님을 만나니, 그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의 내용을 알 수가 없던 중 혜원이 혼자 우암산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청주 고을을 살펴보다가 어느 날 밤중에 고을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그 길로 내려와 용두사 경내에 철당간을 세웠다고 한다.

 

다른 전설로는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일렀다. 청주의 지형을 배에 비유한다면 배에서 중요한 부분인 돛대의 위치가 바로 이 당간이 있는 곳으로 지금도 이 당간이 있는 자리가 청주시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 거리인 성안길이다.

 
 

 

<2009.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