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1607년 '도동'(道東)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78년(숙종 4)에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했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도동서원은 초기에 설립되어 서원 본연의 기능에 충실했던 곳이다. 대원군 당시 보존대상이었던 47개소는 모두 정치 문제에 초연했고 경제적 수탈행위가 덜했던 사액서원이었다.
▲도동서원
▲도동서원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중종은 조광조 등 신진사림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삼았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직계제자였다. 당연히 김굉필의 명예는 실제 이상으로 회복되어 동방오현의 으뜸으로 추앙되어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는다. 1568년 그의 연고지인 현풍에 드디어 서원이 설립되고 위폐가 봉안되었다. 이때의 위치는 현풍읍 동쪽 9km 지점의 쌍계동으로 쌍계서원이라 명명되었다. 김굉필의 인기를 반영하듯 서원건립에는 인근 유림들 뿐 아니라 한양을 비롯한 전국각지의 사림들과 관원들이 참여했다. 당시 쌍계서원은 강당과 동서재, 5개소의 숙소 그리고 하나의 정자로 구성되었다.
▲도동서원
▲도동서원
임진왜란으로 쌍계서원이 불타 없어지고, 서원을 중건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된다. 1604년 우선 사당을 건설하여 위폐를 봉안한 후이듬해 강당 등 서원 일곽을 완비하게 된다. 서원중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영남의 걸출한 예학자 한강 정구였다. 도동서원이 가장 규범적인 서원으로 건축한 것도 정구의 영향이었다. 중건된 지 2년 후에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에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이때의 건축구성은 수월루만 제외하고 현재의 모습과 동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명칭들은 전신인 쌍계서원의 건들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5개소의 숙사들은 중건되지 않았다. 이미 교육의 기능이 축소되엇기 때문이다. 1634년 서원 담 바깥에 제자들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양몽재라는 서실을 세웠지만 후에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1855년 인근의 선비들이 환주문 앞에 이층 누각인 수월루를 창건한다. 누각을 창건한 이유는 “서원의 제도를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유형학적 사고와 “서원을 출입하기에 가파르고 답답하다”는 공간적인 이유에서였다. 수월루는 188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962년 강당과 사당 그리고 담장 일곽이 보물로 지정되어 1973년 수월루가 복원되었다. 현존 수월루는 구조도 빈약하고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 도동서원 전체의 품격에 맞지 않는 졸작이다. 1987년 앞면 석축을 복원했는데 역시 손을 대면 댈수록 품격을 훼손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킨 정도였다.
▲도동서원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앞으로 낙동강을 품고 뒤로 대니산을 기댄 급경사지에 입지했다. 서원의 중건을 주도했던 정구는 이곳에 매우 통일적인 일군의 건축물을 조성했다. 그는 예(禮)를 지고의 가치로 여겼고 그의 예학적 목표는 계측윤리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계측윤리는 곧 개체들간의 서열들을 통한 전체의 통일로 귀결된다. 이는 사회적 규범인 동시에 도동서원의 건축적 구성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급한 경사지를 18개의 좁고 긴 석단들로 터를 닦았다. 후에 조성된 수월루를 위한 석단을 제외한다면, 강당과 사당을 위한 두 곳의 평지 사이에 매우 좁은 수많은 석단들이 중첩된 구성이다. 선단들의 동일한 수법이 대지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석단들의 좁고 넓은 운율이 부분들의 전체성을 이룩한다. 석단들로 조성된 터 위에 건물들을 세웠는데 모두가 맞배지붕의 동일한 형태들이다. 사모지붕의 환주문 만이 다른 형태지만 워낙 규모가 작아 무시될 정도며, 최근 중건된 수월루 만이 팔작지붕의 형태다. 맞배지붕은 가장 단순한 목조건물의 지붕구조이면서도 가장 엄숙하고 견고한 형태다. 다라서 엄격함과 신성함을 지녀야할 유교사당 건물에 잘 어울리는 유형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처럼 모든 건물을 맞배지붕으로 통일시킨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수월루
▲'水月樓' 편액
지나치게 통일적인 형태는 자칫 획일적인 지루함으로 흐르기 쉽지만, 도동서원의 건물들은 변화있는 스케일들을 채택함으로써 이 함정을 벗어나고 있다. 강당은 이례적으로 크며, 동재와 서재는 지나치게 작다. 5칸 강당은 칸살을 크게 잡음으로써 칸수에 비해 커다란 규모를 가지며,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높고 육중하다. 반면 그 앞의 동재와 서재는 3칸으로 칸수를 줄이는 동시에 칸살의 크기도 작게 하여, 건물규모 뿐 아니라 스케일도 감소 축소시켰다. 닮은꼴의 형태로 통일성을 얻는 동시에 스케일의 조정으로 전체성을 획득한다.
담장은 도동서원을 전체화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다. 급한 경사지에 위치한 까닭에 담장들은 경사를 따라 몇 개의 수평선으로 분절된다. 그 분절된 면들의 형태는 동일하지만, 담장 면들의 크기와 길이는 서로 달라 변화있는 집합적 조형을 이룬다. 분절된 담장면들 사이의 관계는 독립적이지만, 그것들이 감싸고 있는 건물들과 명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한 차원 높은 전체성을 이룬다. 도동서원과 같이 담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예에 속한다. 아마도 크고 작은 돌과 진흙으로 견고히 쌓여진 축조기법이나 별모양, 무늬장식 등 의장적 우수함 때문에 보호를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보호해야 할 내용은 담장면들의 비례와 변화있는 스카이라인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담장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대단한 탁견이며,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수월루
▲환주문
성리학적 건축의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특히 도동서원과 같이 예학적 규범이 강조된 건축에서 부분들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로지 전체적인 통일성이 강조될 뿐이다. 도동서원은 대지조성과 지붕과 담장의 동일한 형태를 통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규모와 면적과 스케일이 다양한 변화를 통하여 통일성과 전체성을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 다른 모든 건축적 부분들도 이 전체적 목표를 위해 조절되어 있다. 이 서원의 독특한 석물과 돌조각들도 특정 부분에 만 설치된 것이 아니라 환주문 입구의 계단부터 사당의 기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사용되고 있다. 이 역시 부분적 장소감 보다는 전 영역적 이미지의 구축을 우위에 둔 결과다.
한 직선의 중심축 위에 수월루 - 환주문 - 중정당 - 내삼문 - 사당이 배열되었다. 서원의 중요한 건물이 모두 중심축 선상에 배열된 것이다. 이 정도는 다른 향교나 서원에서도 흔히 발견된다고 한다면, 도동서원은 중심축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한 가지 장치를 더하고 있다. 좁은 폭의 길과 계단을 모두 중심축 선상에 놓았고, 잘 정제된 석물들로 마감하여 중심축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환주문
▲환주문 절병통
성리학의 중요한 규범 가운데 하나가 중용이다. 중용이란 치우치지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것으로 모든 행동의 준거가 되는 규범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대칭의 벙법을 취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유교적 예법은 유독 대칭과 균형을 강조한다. 대칭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건축적 수법은 바로 강력한 중심축을 설정하는 것이다. 유교건축에서 중심축이란 질서요 기준이며 모든 구성원리의 근본이다.
비록 대칭이 유교건축의 규범이라 할지라도 도동서원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초기의 성리학자들은 명목적인 대칭이면 만족하였고, 어긋난 치수나 각도를 오히려 여유로 즐겼기 때문이다.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에서는 부분적인 비대칭은 물론, 아예 사당영역을 중심축 선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담장
▲담장
명실상부한 대칭성의 규범을 적용할 때, 가장 문제가 발생하는 곳은 생활공간이다. 서원 내부의 생활곤간은 동재와 서재이다. 수십명의 유생들이 기거해야 할 이 건물들은 동향과 서향으로 놓여져 매우 불리한 일조조건을 감수하고 있다. 또 서원 마당의 초월적인 규범을 위하여 일상적인 기능들은 모두 전면에서 제거되었다. 난방을 위한 아궁이 마저 모두 건물의 뒷면에 은폐시켜, 비록 노복들의 임무이기는 하지만 불때기에 무척 불편하다.
강당이나 사당 등 일시적인 의례에만 사용하는 공간은 의례 자체가 대칭적으로 구성되고 잠깐 동안만 참으면 그뿐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은 그처럼 대칭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않다. 도오서원은 대칭성의 규범을 전사청영역까지 적용하려 했다. 전사청은 서원 노복들이 기거하면서 유생들의 음식과 세탁, 청소 등을 수발하던 곳이며, 제사 때에는 제수를 마련하고 참례인들의 숙소로 제공되던 곳이다. 이런 행위들은 전혀 비대칭적임에도 불구하고 전사청은 e자 집으로 대칭적인 방배열을 하고 있다. 그 후에 생활상의 필요에 의해 잦은 변형이 있었고, 실질적으로 대칭의 구성이 해체되었지만.
▲중정당
▲중정당
전사청 영역 전체의 중심축은 서원 중심축과 정확한 평행을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서원 앞의 오래된 은행나무까지 중심축 선상에 심어진 듯하다. 한치의 오차나 한 차례의 실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예학자의 정신을 보는 듯하다.
성리학적 질서란 모든 인간의 행위에 ‘서(序)’를 정하는 것이다. 흔히 향교와 서원의 모습은 공자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으로 비유된다. 서원에서 강당과 동서재의 관계, 혹은 향교에서 대성전과 그 앞의 동서무와의 주종적인 관계를 빗대어 유추한 표현이다. 건축마저도 인간들의 관계로 의인화하여 서열을 매기고 위계화한다. 도동서원의 경우 우선 서원 영역이 주인이며, 전사청 영역이 하인이다. 하인 영역은 주인 영역보다 커서도, 높아서도, 화려해서도, 튼튼해서도 안된다. 서원 내부로 오면 사당 영역이 강당군보다 높아야 하고, 화려해야 하며, 독립적이어야 한다. 도동서원이 이전 중건되던 17세기 초는 이미 향사 위주로 서원의 기능이 변모하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중정당 기단
▲중정당 기단
강당군에서는 당연히 강당이 첫째, 동서재가 둘째, 그 앞의 대문이 마지막 서열이다. 아랫 서열의 건물은 윗 서열의 건물보다 커서도, 높아서도, 화려해서도, 튼튼해서도 안된다. 이러한 위계적 규범 때문에 동재와 서재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동서재의 칸수는 3칸으로 한칸 마루와 두칸 방으로 이루어졌다. 온돌방이야 두칸 규모니 견딜만 하지만, 마루 한 칸은 10여명의 유생들이 이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면적이다. 지혜를 짜낸 비법이 마루와 온돌의 칸 크기를 달리하는 것이다. 온돌은 한칸이 2.16m인 반면 마루는 그 1.4배에 해당하는 3.03m다. 3칸의 규범은 지키되 충분한 면적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면 동재와 서재를 4칸이나 5칸으로 늘리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커다란 강당, 즉 스승이 5칸이기 때문에 제자인 동서재는 3칸을 넘으면 안된다. 짝수는 성리학적으로 불리한 수이기 때문에 4칸은 더더욱 안된다. 명목적 규범과 실제적 필요가 충돌하는 현장이다.
건물 뿐 아니라 부분적인 요소들에도 서열이 정해진다. 동재는 상급학년이, 서재는 하급학년이 사용한다. 강당의 동쪽계단은 주인이 사용하고, 서쪽계단은 손님이 사용한다. 이러한 위계적 규범은 ‘주자가례’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의례가 건축의 평면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사당 앞에는 반드시 삼문이 있어야 한다. 제사 때에 동쪽 문은 연장자들이, 서쪽문은 연소자들이, 그리고 가운데 문은 선현의 혼들이 출입하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도동서원의 경우 내삼문 앞의 계단은 가운데 칸과 동쪽 칸에만 놓여있다. 원래 3칸 모두에 놓여 있다가 서쪽 칸의 계단이 없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원상태를 알 수 없다. 현재의 의례는 비대칭적인 계단의 형태에 맞추어져 있다. 동쪽 계단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곳이고 가운데 계단은 나오는 곳이다.
▲중정당 기단
▲중정당 기단 조각
건물 명칭과 격식에 의해 건물들의 서열이 매겨진다. 전통건물들의 이름은 ○○전, ○○당, ○○정 등의 이름 어미를 갖는다. 그 어미들은 건물의 용도나 격식을 의미하며, 이름 어미의 서열과 위계는 엄격하다. 예를 들어 전(殿)은 임금이나 부처, 공자 등 신적인 존재들만이 가지는 최상의 건물이다. 다음은 각(閣)이며 그 다음이 선현들이 기거하는 사(祠)나 묘(廟)이고 마지막으로 일반인들이 살 수 있는 당(堂)이다. 여기가지가 건물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라면, 방들의 명칭에도 서열이 있다.
퇴계의 의견을 다르면 선생과 학생들이 모여 강학하는 방은 정사(精舍)이고, 그 다음이 공부하는 방 재(齋), 그다음이 경관을 감상하고 심성을 수양하는 방 헌(軒), 그리고 잠자는 방 료(寮)다. 하위서열의 방이나 건물은 상위서열보다 커서도 높아서도 화려해서도 고급스러워서도 안된다. 성리학자들의 건축유형학은 기능과 형태의 관계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유형의 명칭과 사용자, 재료, 구조까지를 지시한다.
▲중정당 기단조각
▲정료대
청백리의 표상이며 임진란의 영웅이었던 서애 류성룡의 집안은 청빈하기로 이름높은 가문이었다. 서애를 포함한 4남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분재기에는 이른바 자녀균분상속의 관례와 재산권을 주부가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애의 모친이 직접 작성한 분재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우리 집안은 원래 가세가 청빈하여 나누어 줄 재산이 별로 없다. 그나마 임진왜란으로 인해 노비들이 굶어죽고 전답은 황폐해졌다. ... 비록 얼마되지 않는 재산이나마 공평하게 나누어주니, 윗대의 뜻을 받들어 유용하게 쓰도록 하라. ...노비는 질병과 기근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146명이 생존해 있다. 전답은 하회와 풍산현에, 할머니 친정인 군위에, 외가인 의성에, 비안과 연안, 서울과 광주, 멀리 고성과 간성이 조금씩 모두 3,000여 마지기밖에 없다.
▲중정당 대청
▲'道東書院' 편액(퇴계글씨)
전쟁 중에 대부분 굶어 죽고도 146명의 노비가 남앗다니, 참으로 청빈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서애 집안을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극히 현대적인 시각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영의정을 지낸 집안의 형편이 이 정도면 매우 청빈했던 것이 사실이다. 청빈이란 ‘재물을 탐하지 않아 공군하다’는 뜻으로 불가항력적인 빈곤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빈곤을 자청하는 자발적 가난이라고 할까. 다시 말하면 부유한 여건 속에 있으면서도 가난하게 살아가는 절제의 미덕이며, 가진자의 여유를 의미한다.
청빈한 건축은 장식이 배제되고 구조체 자체가 노출되고 극히 필요한 기능만을 수용한다. 어떤 면에서는 ‘초기 근대건축’이 추구했던 윤리적인 건축이다. 병산서원 만대루는 청빈한 건축의 극한을 보여준다. 아무런 기능적 욕심도, 일절의 장식과 가식과 은폐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극히 필요한 부재들로 극히 필요한 규모만큼 지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윤리적이어야 하는 민가들의 곤궁함과는 달리, 병산서원은 충분한 재력과 기술이 있으면서도 나타내지 않았을 뿐이다.
▲중정당 판문
▲'道東書院', '中正堂' 편액
도동서원에서는 청빈의 이중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간당의 기단은 대단한 기교와 정교한 기술로 축조되었지만, 기단 위의 건물은 위압적이기는 하지만 예의 윤리적인 구조물이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성이었다. 강당 기단은 평평한 돌들을 여러 조각으로 다듬어 정교하게 맞추었다. 부재들은 r자형, 한쪽귀가 먹은 사각형, 가장 복잡한 형태로는 최대 9각형까지 가공되었고 평범한 사각형 부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단 윗부분에는 몇 개의 장식물을 조각하여 끼워 넣었다. 건물 전면 6개의 기둥 위치에 맞추어 용머리를 조각한 4개의 돌과 다람쥐를 조각한 한 쌍의 판석을 끼워 넣었다. 기단 중앙에는 무엇인가 글자를 새기려고 준비한 것같은 액자형의 미끈한 판석을 삽입했다. 기단의 윗면은 넙적한 가공석을 덮었는데, 두 단으로 처리하여 이중갑성의 기법을 보여준다. 간당의 측면에는 돌판으로 만든 한 쌍의 툇마루가 놓여있다. 모두 다른 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최고급의 구조물들이다.
▲서재
▲동재
반면 기단 위의 구조에는 매우 청빈하여 대조적이다. 우선 초석들부터 가공되지 않은 덤벙주초이고 그 위의 기둥은 민흘림이 있는 소박한 부재들이며, 포작은 출목이 있는 이익공 계통으로 고려조의 주심포 건물에서 느낄 수 있는 강건함과 소박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다른 서원에 비한다면 다소 장식적이기는 하지만 기단의 구서에 비한다면 매우 가난한 건물이다. 귀솟음의 기법도 생략된 맞배지붕 때문에 건물의 형태는 직선적이다. 화려함이나 기교와는 거리가 먼 상부구조다.
도동서원의 경우는 기단 축조에 상부구조물 공사비의 배 이상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면 왜 기단을 그처럼 기교적으로 처리했는가? 아마 당대 최고의 서원으로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상부 구조물에는 자제했지만 외부에서 눈에 잘 안띄는 하부구조에 쏟아부은 것이 아닐까? 이러함 심증을 굳혀주는 것은 공사 당시의 재정적인 상황이었다. 1604년, 사당을 먼저 건설한 후 서원 중건의 사실이 전국에 알려져서, 경향각지의 유림들과 고위 정치가들이 앞을 다투어 성금을 보냈다. 강당 일곽을 신축할 때는 이미 소요 공사비의 몇 배가 답지해 있었고 그 잉영비용을 강당 기단을 포함한 석물공사에 쏟아 부었을 것이다. 먼저 건립된 사당의 기단이 비교적 단순하게 처리된데 비해 다른 부분들의 돌공사는 매우 장식적으로 처리된 이유가 될 것이다.
▲내삼문
▲계단
유교건축 전반을 흐르고 있는 청빈의 미학 속에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고도의 기교와 표현의지가 숨어 있다. 자연을 가장한 인공의 수법이라든가, 절제된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은폐되어 있는 복잡한 구조 등, 도동서원의 경우는 이러한 이중성을 눈에 띄게 드러내 놓았을 뿐이다. 유교건축의 정숙하고 경건한 공간적 성격을 목원대의 이왕기 교수는 ‘경(敬)의 공간’으로 지칭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경이란 성리학의 시작이며 끝이다. 주자학의 근본 경전이 대학에는 “경이란 한마음의 주인이며 모든 일의 근본이다”고 되어있다.
성리학은 지행합일의 이상을 가지고 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이 다라야 하며, 그 수양방법의 기본이 경이다. 도학자는 항상 경건한 생활 속에서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고 터득하는 것이다. 서원건축의 궁극적인 목표는 거경궁리(居敬窮理). 즉 학문할 수 있는 경건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도동서원의 건물들이 직선적인 맞배지붕으로 통일화 위계화하는 까닭도 신선하면서도 경건한 장소를 만들기 위함이다.
▲사당
▲위패
경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理)를 얻는 것이며, “정(靜)은 이의 체(體)며 동(動)은 이의 용(用)이다.” 경건한 공간은 조용하며 정지되어 있다. 도학자들의 행동은 신중하고 말을 삼가는 것과 같이 그들의 공간은 침묵과 정적이다. 흔히 ‘경의 공간’이라면 제사공간의 예를 들지만, 경이란 실천적 수양의 근본이기 때문에 제사공간 뿐 아니라 강학과 수양의공간도 포함한다. 특히 사당영역은 담장들을 둘러 독립된 - 정확히 말하며 고립된 - 일곽을 이루면서 더욱 정적이고 정숙한 공간을 이룬다. 여기에는 일체 외부의 경관이나 소음이 침투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죽은 자들의 집 앞에 성ㄴ 부족한 후학들만 있을 뿐이다.
도동서원 사당은 강당보다 6m 정도 높은 지점에 위치한다. 여러 단의 석축을 쌓은 급경사면들은 계단식 정원을 이루며, 그 위에 담장을 두른 독립된 일곽이 사당이다. 사당 마당에 붙어서 ‘증반소’가 잇지만 당장으로 격리하여 사당이 독자성을 유지한다. 넓적하게 가공한 판석으로 기단을 쌓고 기단 위에 전돌을 깔았다. 기단의 솜씨는 세련됐지만, 가앋 기단과 같은 기교는 보이지 않는다. 기둥의 초석은 원형으로 다듬은 정평주초로 역시 강당의 덤벙주초와 비교된다. 건물에는 귀솟음이 있고 단청이 화려하여 소박한 강당과는 달리 상징성을 높이고 있다. 측면 상부에 들창이 있어 내부를 너무 어둡지 않도록 조절한다. 사당 내부의 단청은 17세기 창건 때의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흥미를 끌며, 특히 양 측벽상부에 그려진 문인화풍의 산수화가 눈에 뜨인다.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와 ‘설로장송(雪路長松)’을 묘사한 그림으로 작자는 모르겠지만 예사로운 솜씨는 아니다.
▲감(龕)
▲감(龕)
예학이 발달했던 17세기에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가치기준은 예였다. 가례의 보급은 제사의 예법에 맞도록 종갓집들의 평면계획을 변화시킬 정도였다. 영남학파 최고의 예학자 정구가 주도한 도동서원은 예법에 충실한 건축공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예는 추상적인 행위기준일 뿐 아니라, 구체적인 건축적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었다.
도동서원의 중요한 동선들은 모두 중심축 선상에 놓여져 있다. 수월루 앞의 계단부터 환주문 앞의 계단, 환주문과 강당 중심 사이에 놓여진 좁고 긴 포장로, 그리고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들. 이들 통로와 계단은 아주 정성스럽게 가동된 석재들로 만들어졌다는 점 외에도 폭이 65~70cm 정도로 아주 좁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넉넉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통로들의 폭을 좁힌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항사 때에 참여하는 모든 인원들은 직책과 서열이 정해지는 바, 모든 이동은 그 서열에 따라 일렬로 이루어진다. 가장 원로가 앞에 서고 2~30명의 인원이 좁은 통로와 계단을 오르내리는 유림들의 기다란 줄은 그 자체가 바로 예이며 성리학적 질서가 된다. 좁은 계단들은 철저하게 일인용으로 계획된 것이며, 일상적인 이동조차 예(禮)와 서(序)에 적합하도록 훈련시키기 위한 장치들이다.
▲담장
▲담장
서원의 주요 기능이 교육에서 제사로 전환되던 17세기에 가장 중요한 예법은 상례와 제례였다. 봄 가을의 향사와 매월 두차례의 분향례를 치루어야 할 서원에서 제례법이 발전한 것은 당연했다. 가다로운 제례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도동서원에는 제례를 위한 특수한 설비들이 남아있다. 중정당 동쪽 - 나침반의 방위로는 서쪽 - 옆 마당에 생단(牲壇)이라는 정사각형의 판돌이 놓여있다. 생(牲)이란 향사 때 제수로 쓰일 소나 돼지, 염소와 같은 짐승을 말하며, 생단은 제사 전날 여기에 생을 올려놓고 제관들이 품질을 검사하는 곳이다. 생단 상석의 아래는 모를 접은 사각형 돌기둥을 받치고 있다. 현존하는 생단 가운데 비교적 정교하게 가공된 예다.
강당 앞 중아에 놓인 정료대(庭寮台)는 긴 돌기둥과 사각형의 상석으로 이루어졌다. 정료대란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야간에 불을 밝히는 일종의 조명대다. 서원의 정료대는 야간에 벌어지는 제레를 위해 쓰이며, 일반적으로 사당 앞마당에 놓여진다. 도동서원과 같이 강당 바로 앞에 놓이는 경우는 흔치 않으며, 이 서원의 제례가 강당에서부터 시작됨을 알려준다.
▲석등
▲담장
사당 앞에는 화사석이 분실된 석등이 놓여있다. 정료대와는 달리 등잔이나 호롱불을 넣어 조명하던 시설이다. 사찰의 팔각형 석등들과는 달리 사각형태를 주조로 했다. 사당의 서쪽 - 자연방위는 동쪽 - 담장에는 차(次)라고 하는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있다. 이 장치는 제사 때 쓰인 제문을 태워버리는 설비다. 보통 서원에서는 별도의 차를 두지 않고 사당 기단 한 귀퉁이에서 태워버리지만 예법에 충실한 도동서원에는 특수한 장치가 고안되었다. 담장의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장 바깥쪽으로 수키와를 끼워서 굴뚝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차를 설치하면서 담장이 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그 부분의 담장을 특별히 두껍게 쌓은 치밀함도 보여준다.
아무리 철저한 도학자에게도 위계와 질서, 경건과 침묵, 규범과 통일성만으로 구성된 공간은 숨 막히도록 답답할 것이다. 도동서원이 유교적 규범과 예법에만 충실했다면 명건축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동서원에는 규범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인 파격이 있고, 침묵과 긴장을 풀어줄 단편적인 공간이 삽입된다. 또 엄격한 수양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유희적인 장소와 요소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균형잡힌 건축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장서각
▲생단
서원의 입구에 세워진 수월루는 19세기에 창건된 것이고,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 복원품이다. 현재의 수월루는 너무 높게 지어서 강당에서 바라보는 전면 경관을 방해하고, 건물 자체의 비례도 어정쩡해 형태적으로는 문제가 있다. 빈약한 부재들과 엉성한 결구법들에 덧씌워진 요란한 단청은 오히려 천박한 느낌을 준다. 19세기의 누각은 이렇게까지 졸작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월루가 뒤늦게 세워진 이유는 앞서 밝힌 바 있다. 명목상의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원이 향촌사회의 본거지로 자리 잡으면서 각종 향음례와 양로회 등의 연회성 집회를 열 장소가 필요했던 점이다. 또 평시에는 유생들이 휴식하고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서원 앞의 누각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시설이다.
수월루는 위치와 형상에 문제가 있지만 절저하게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창건당시의 기록을 보면 수월루에서 바라보이는 주변의 경관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동쪽으로는 흐르는 물의 원류를, 서족으로는 푸르른 못산의 장관을, 남쪽으로는 제일강산정의 풍류가, 북쪽으로는 낙고재의 모습이, 위쪽으로는 사물(四勿)과 삼성(三Ꝭ)ml 서원 규칙이, 아래로는 조한정과 강변의 경치를 볼 수 있었다. 동서남북상하의 6방향으로 선택된 특정한 경관구조를 보여준다. 이때가지만 해도 강변에 부속정자(照)寒亭가 있었던 모양이다. 조한정은 수월루가 없던 초창기에 누각의 역할을 대신해 휴식과 중류의 장소를 제공했을 것이다.
▲비각
▲외부담장
수월루가 없었다면 서원의 정문은 환주문이 된다.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는 의미의 이 문은 심각한 이름과는 달리 명문 도동서원의 정문이 되기에 너무 작고 우스꽝스럽다. 좁은 전면 계단 폭에 맞추어진 듯, 한 사람이 출입하기에 적합할 정도로 좁게 설정되어 있다. 문의 높이도 1.5m로 낮아 갓을 쓴 유생들은 머리를 숙여야 겨우 들어올 수 있을 정도다. 어쩌면 들어올 때부터 머리를 숙여 경건함을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네 기둥으로 이루어진 한 칸 문 위에 사모지붕을 얹었다. 근엄한 맞배지붕들 속의 돌연변이와 같은 형태를 항아리모양으로 만든 절병통으로 - 80년대 초에는 떡시루를 뒤집어 놓았었다 - 마무리했다. 문 구조물만으로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재미있고 도저히 이 근엄한 서원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강당 대청에서 보면, 환주문이 작고 뾰족한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강당과 마당에서 전면으로 경관을 틔우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한 것 같다. 지형의 경사가 급함으로 담장을 높게 할 경우 앞의 낙동강을 가리게 되고, 낮게 할 경우는 너무 허한 인상을 갖게 한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애초에는 전명에 누각을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대문채를 우람하게 세우면 전면 경관을 망쳐버리는 우를 범한다. 다라서 작으면서도 형태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문이 필요했다. 자체로서는 우스꽝스러운 환주문이 좌우의 담장과 앞산들과 중첩되어 그림같은 경관을 만들어 낼 때는 그 깊은 뜻과 고도의 감각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외부담장
▲전사청대문
무엇보다도 특이한 건축요소는 서원의 도처에 갈려있는 돌 조각들이다. 사암계통의 재질이어서 지금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환주문 계단부터 사당 앞까지 중심축을 따라 중요한 요소요소에서 보는 이의 미소를 자아낸다. 환주문 앞 계단 소맷돌에 돌짐승 한 쌍을 세움으로써 시작한다. 환주문 바로 앞 계단 위에는 꽃봉오리를 세워 머무름을 유도한다. 강당 앞 마당에 중앙에 반쯤 걸쳐져 놓인 포장석들은 동선의 연속성을 더욱 자극한다.
강당 기단의 장식은 이미 말 한 바 있다. 4개의 용머리 중, 바깥쪽 것들은 여의주를 물었고 안쪽 것들은 물고기를 물었는데, 물린 물고기들은 빙긋이 웃고 있다. 한 쌍의 다람쥐 조각 중 한 마리는 올라가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고 있다. 사당 앞 계단 소맷돌에도 역시 한 상의 돌짐승이 놓여있다. 사자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하다. 계단에는 용머리가 삽입되고 卍자 문양과 꽃잎문양이 새겨지기도 했다. 근엄함과 간결함을 규범으로 하는 서원건축에는 매우 파격적인 장식들이다.
▲전사청
▲전사청 창고
▲은행나무
▲은행나무
<2009. 10. 18>
'◈한국문화순례◈ > 달구벌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성 관수정(觀水亭) (0) | 2009.11.07 |
---|---|
달성 낙고재(洛皐齋) (0) | 2009.11.06 |
전탑순례 -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塼塔) (0) | 2009.10.19 |
대구 동화사 약왕보살좌상 (0) | 2009.08.11 |
대구 동화사 영산전 석조 16나한상 (0) | 2009.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