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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흥평시 양귀비묘(杨贵妃墓, Yáng Guìfēi Mù)

蔥叟 2009. 9. 30. 08:36

중국 흥평시 양귀비묘(杨贵妃墓, Yáng Guìfēi Mù)

 

   양귀비묘는 흥핑셴[兴平县]의 서쪽으로 12.5㎞ 떨어진 마웨이전[马嵬镇]에 위치한다. 여기에 당나라 궁정 사랑비극의 주인공이 묻혀 있다. 능원(陵园)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고대의 건축양식을 모방한 몇 개의 건축과 소상(塑像) 등이 있다. 양귀비묘는 외형이 반구형이고 높이가 3m 내외이다. 하지만 다른 묘와 달리 외곽이 청벽돌에 싸여있다. 관중일대에 帝王將相과 皇親國戚의 릉묘가 수백개 있지만 유독 양귀비묘만 벽돌로 덮어싼것은 무슨 원인인가?  

 

▲양귀비묘(杨贵妃墓) 입구

 

▲양귀비묘(杨贵妃墓) 전시관

  

   전설에 따르면 이 부근에 피부가 검고 아주 못난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외모 탓으로 중매군도 찾아와주지 않으니 너무 상심하여 양귀비묘에 엎드려 하늘이 불공평하다면서 대성톡곡하였다. 집에 돌아가 흙이 묻은 얼굴을 씻었더니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워졌을뿐만 아니라 용모도 아주 이쁘게 변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시집을 갔고 이 일도 점차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였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분분히 양귀비묘에 와 흙을 파서 아내거나 딸에게 가져다 주었다. 묘가 점점 작아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할수없이 벽돌로 감싸 더 파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양귀비묘 정원의 벽에 역대명인이 시를 남긴 비석들이 박혀있다. 이들은 서예로서의 예술가치가 있을뿐만아니라 이 사랑비극에 대한 부동한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여자는 禍水"라는 결론을 내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양귀비를 동정한것이다.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손꼽히는 양귀비(楊貴妃)의 원래 이름은 옥환(玉環), 도호(道號)가 태진(太眞)이다. 지금의 산서성 영제(永濟)인 포주 영락(蒲州 永樂) 출신으로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립(楊立)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가무와 음률에 뛰어났으며, 총명하면서도 용모가 천하절색이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武惠妃)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로 17살의 꽃다운 나이에 궁궐에 들어갔다. 

 

▲양귀비묘(杨贵妃墓)

 

▲양귀비묘(杨贵妃墓) 일원

 

▲양귀비묘(杨贵妃墓) 일원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가 죽자 모든 게 시들해졌다. 아들 수왕의 왕비가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을 듣고 양귀비를 술자리에 불렀다가 자기의 며느리가 추는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를 보고 그 어여쁜 자태에 첫눈에 반해 버리게 된다. 결국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게된 현종을 위해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음모를 꾸미게 되고 결국 양귀비를 수왕의 곁에서 떠나게 한다. 수왕을 떠난 양귀비는 화산(華山)으로 가서 양태진(楊太眞)이란 도호로 여도사(女道士)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현종은 위씨(韋氏) 성을 가진 여인을 아들 수왕에게 출가시켜 아내로 삼도록 배려한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태진궁(太眞宮)을 지어주고, 이곳을 그들만의 사랑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천보(天寶) 4년(745)에 '귀비(貴妃)'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하였다. 현종의 극진한 총애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양귀비의 형제자매들은 그 세력이 강대해져 궁궐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 권세를 과시하며 많은 사람들을 농락했다. 특히 그녀의 셋째 언니 괵국부인의 집에는 전국 각지에서 청탁을 하러 찾아오는 관리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들이 바치는 진상품들로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양귀비의 언니들도 모두 뛰어난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는데, 어느 날 현종은 괵국부인과 눈이 맞아 양귀비를 배신하고 그녀와도 정사를 벌였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양귀비는 질투심에 타올라 괵국부인을 입궐시키라는 현종의 명을 거역하게 된다. 이 일로 현종의 미움을 산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으로 내쫓긴다. 

 

 

▲양귀비묘(杨贵妃墓) 후원

 

▲양귀비상(杨贵妃像)

 

▲양귀비상(杨贵妃像)

 

   당시에 양귀비의 후광을 입어 승상의 지위에 올랐던 양국충은 젊은 시절에는 고향에서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내다 군에 입대하여 전장터에서는 용맹을 떨쳤지만, 평소 어질지 못한 심성으로 인해 온갖 패악을 부리다가 직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나게 된다. 그 후 선우중통(鮮于仲通)의 집에서 집안일을 관리하다 하인들의 돈을 가로채 양귀비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부터 양국충은 괵국부인인 양옥쟁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게 되는데 괵국부인으로 인해 시끄러워진 이번 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승상 양국충이었다.

 

   양씨 가문의 운명이 양귀비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국충은 고력사와 합심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화해시키기로 하고, 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華淸池)로 보냈다. 화청지의 물속에서 반쯤 드러난 양귀비의 아름다운 육체를 본 노구의 현종은 결국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름다운 양귀비를 품에 안음으로써 그간의 앙금을 털어버리게 된다.  

 

   두 간신의 노력으로 다시 양귀비와 화해를 하게 된 현종은 양귀비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다. 양귀비의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유희와 쾌락에 정신을 잃은 현종에게서 더 이상 지난날 성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현종은 전기에는 두 명의 명재상 요숭(姚崇)과 송폭(宋爆)의 보좌로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이루어냈지만, 후기에는 두 명의 간신 이림보(李林甫)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天寶大亂)'을 맞이하였다. '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한다.

 

▲양귀비 무용도

 

▲귀비입도도(妃入道圖)

   
   영주(營州) 유역(柳域)의 호인(胡人)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

 

   천보 6년(747)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興慶宮)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양귀비는 그러한 안록산의 우람한 몸집을, 특히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한다.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곤 했다. 심지어 목욕이 끝난 다음에는 오색천으로 요람을 만들어 안록산을 어린애처럼 굴게 하고 그를 요람에 눕히기도 하였다. 수십명의 궁녀가 요람을 흔들어 양귀비 앞에 올 때 마다 안록산은 그녀를 "엄마" 하고 불렀다. 40대 후반의 아들을 둔 20대의 젊은 엄마, 그들은 아마도 변태적인 사랑을 좋아했던 것 같다.

 

   원래 양국충은 안록산과 연합하여 이림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림보가 먼저 죽자 그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등에 업고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가는 안록산에게 위협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 앞에서 자주 안록산을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양귀비는 자기 애인을 비방하는 양국충의 말을 그대로 안록산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후 안록산은 양국충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변호해 주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일마저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귀비입도도(妃入道圖)

  

▲귀비입도도(妃入道圖)

 

   755년 마침내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깜짝 놀라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韋見素),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延秋門)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馬嵬坡, 지금의 섬서성 흥평<興平>)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 수 없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이부분을 장한가는 다음과 같이 읊고있다. 

 

九重城闕煙塵生       천자의 궁에도 전화의 연기와 먼지가 피오올라

千乘萬騎西南行       천자 일행은 촉으로 피난길에 올랐네

翠華搖搖行復止       천자깃발 흔들흔들. 나아가단 멎고, 멎었다간 다시 나아

西出都門百餘里       장안서쪽 백여리 마외파에 이르렀네

六軍不發無奈何       호위병들 하나같이 발걸음 떼지않아 어쩔 수 없이 이르렀네

宛轉蛾眉馬前死       갸름한 눈썹의 미인, 병사들의 눈앞에서 자결하고 말았네

花鈿委地無人收       꽃비녀 떨어져도 아무도 주어들지 않고

翠翹金雀玉搔頭       취교, 금작, 옥소두 모두 땅에 흩어졌네

君王掩面救不得       천자는 얼굴가린 채, 그녀를 구하지 못해

回看血淚相和流       머리돌려 피눈물 비오듯 흘렸네

 

   한편 중국의 4대 미인은 양귀비, 서시, 왕소군, 그리고 초선이다. 서시(西施)는 하(夏)왕조의 말희, 은(殷)왕조의 달기와 더불어 서시는 지금의 항주출신으로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미녀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중국의 4대미인 중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고 있다.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침어(沈漁)라 한다.


   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원제(元帝) 때 수많은 궁녀 중 하나로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지녔지만 황제의 주의를 끌지 못하다가 흉노족에게 시집을 간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다. 당시 한나라는 흉노족의 위협을 막기 위한 회유정책으로 궁녀를 시집보내 화친을 맺었는데 너무 많은 궁녀를 일일이 살필 수 없었던 황제는 화공이 그린 초상화로 가장 미모가 떨어지는 궁녀를 뽑았다.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가 그만 가장 못난 궁녀로 그려져 간택되고 만 것이다. 그녀가 떠나기 전 날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황제는 너무나 안타까워 화공의 목을 쳤고, 왕소군은 자신의 한을 담아 시를 읊었는데 "왕소군 원가"로 전해지며 많은 중국 문학의 소재가 되고 있다.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 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에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낙안(落雁)이라 한다.

 

 

▲양귀비(杨贵妃)

 

▲양귀비(杨贵妃)

 

   초선(貂蟬)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연환계의 주인공이다. 절세미인으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결국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했지만, 여포가 죽을 때까지 그의 첩으로 지냈다. 또한 초선의 운명이 가인박명(佳人薄命), 즉 여자의 용모가 아름다우면 운명이 짧거나 기구하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더욱 그녀의 미모에 많은 호기심이 여전히 남아있다.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사이로 숨어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폐월(閉月)이라 한다.

 

  양귀비(楊貴妃)는 동양의 클레오파트라로 불리는 당 현종의 총애를 받다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미인이다. 원래 양귀비는 현종의 며느리였으나 35세의 나이를 뛰어넘는 로맨스로 오늘날까지도 유명하다. 양귀비의 모습은 백락천의 "장한가"에 의하면 글래머에 가까운 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체구는 작은 편이어서 당현종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새처럼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수화(羞花)라  한다.

 

 

 

<2009.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