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안 흥교사 장안측사탑(长安測師塔)
서안 흥교사의 자은탑원에 있는 신라 승려 원측의 사리탑이다. 가운데에 스승인 현장법사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왼쪽에 원측스님의 사리탑 오른쪽에 기사탑 즉 규기스님의 사리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대충 봐서는 스승격인 현장을 중심으로 양대 제자뻘인 규기와 원측의 공덕을 기리려 지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교사 기록들은 사이좋은 탑 모양새와는 반대로 규기와 원측이 불교학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규기와 원측의 갈등은 645년 현장이 인도에서 갖은 곡절 끝에 대승불교의 새경전들을 들고 극적으로 귀국하면서부터 비롯된다. 외국어에 천재적인 능력을 지녔던 원측은 <유가론><성유식론> 등 현장이 가져온 새 경전의 범어 글귀들을 누구보다 빨리 이해하고 가장 앞서 이들 경전의 주석서를 발표하며 해석을 선도했다. 당연히 현장의 수제자였던 규기 일파로부터 혹독한 모함과 시기가 돌아왔다. 후대에 중국 사서인 <송고승전〉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은탑원(慈恩塔院)
“현장 스님이 불경을 처음 옮겨 강론장에서 소개할 때 원측이 문지기를 구슬려 강론장에 몰래 들어가 엿듣고 의장을 꾸민 것이다.” 뇌물을 주고 도둑처럼 강의실에 들어가 현장의 지식을 가로챘다는 말인데, 현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대목을 규기 일파의 조작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만큼 원측스님의 불교학실력이 탁월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로 보는 것이다. 현장이 수입해온 것은 만물의 존재적 본질을 인식하는 방법을 찾는 관념 철학인 유식학, 곧 법상종이었다. 중국 불교사의 뼈대가 되는 이 종파의 주도권을 놓고 규기는 줄곧 원측 스님을 이단으로 몰려 했다. 깨달음을 얻는 이는 본래 제한되어 있다는 규기파의 배타적 학설에 맞서 근기에 따라 수행하면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평등수행론을 역설한 원측의 사상은 날카롭게 부딪혔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규기파의 견제로 중국에서 원측의 사상은 뿌리를 뻗지 못한 반면, 제자들에 의해 신라와 서역 티베트로 전해져 흥성했다는 점이다. 제자 담광이 원측의 저서〈해심밀경소>를 서역 둔황으로 가져가 티베트어로 번역하고 티베트의 서장대장경에 그의 저술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생불로 받든 측천무후의 만류로 귀국하지 못했지만 신라에서도 도증 등의 귀국 제자에 의해 법상종을 뿌리내리는 비조가 되니 서역과 신라에 불교사상을 전파한 주역이 된 셈이다.
▲측사탑(測師塔, 원측법사탑)
지붕이 잡풀에 덮인 채 숲에 가려진 원측의 탑은 낡았지만 단호한 권위가 서려있다. 이국 땅에서 시기에 시달린 그 또한 고향 경주를 절절이 그리워했으리라. 7세기 당나라에 유학해 중국과 서역의 불교사상사에 발자취를 남기고 현지에서 세상을 뜬 고승 원측(613~696)은 사서와 중국쪽 불교 관련 문헌기록을 보면 그는 경주 모량부 출신의 신라 왕손으로 아기 왕자 때인 3살 때 출가해 15살 이전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난 총명한 승려였다. 일찍부터 어학에 밝아 범어(산스크리트어) 등 6개 국어에 통달했던 그는 인도의 불경 번역과 해석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서역여행기인 <대당서역기>의 저자로 유명한 현장과 더불어 불교학의 핵심인 유식사상(법상종)을 일으키면서 불교사의 한 봉우리로 우뚝 서게 된다.
원측스님에 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도 전한다. 경주시가지에서 서쪽으로 약 40리, 건천읍과 산내면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부산(富山)은 높이 약 640m의 산으로 전설과 역사유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지리지에는 부산(夫山)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며 주사산(朱砂山), 오봉산(五峯山)이라는 이름도 「부산」안에 있는 주사암(朱砂庵)이나 오로봉(五老峯)에서 온 별칭이다. 부산성은 문무왕 때 쌓은 성으로 삼국유사에 죽만랑의 이야기가 부산성을 배경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인들이 당시에 이중으로 부역을 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또한 왕비를 배출하던 모량부 박씨의 도태원인을 말해준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측스님은 바로 모량부 출신이었다.
▲측사탑(測師塔, 원측법사탑)
제32대 효소왕 시대 죽만랑(竹蔓郞)의 화랑 무리 중에 득오 급간(得烏給干)이 풍류황권(風流黃卷, 화랑들의 출석부로 생각됨)에 이름을 달아놓고 날마다 출근을 하더니 열흘이 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그대의 아들이 어디에 갔느냐?” 고 물었더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당전(幢典)으로 있는 모량 땅의 익선아간(益宣阿干)이 우리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창고지기로 임명하여 그곳으로 서둘러 가기에 길이 바빠서 미처 낭에게 하직 인사를 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죽만랑이 말하기를, “그대 아들이 만약에 사사로운 볼일로 갔다면 구태여 찾아볼 것도 없겠지만 이제 들으매 공무로 갔다 하니 찾아보고 음식 대접이라도 해야만 되겠다” 하고는 곧 떡 한 그릇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하인을 데리고 가는데 화랑 무리 137인이 역시 위의를 갖추고 뒤를 따랐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지금 익선(益宣)의 밭에서 전례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 하였다.
▲측사탑(測師塔) 명문
죽지랑이 밭으로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으로 그를 대접하고 익선에게 말미를 청하여 곧 함께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익선은 기어코 못 보내겠다고 승낙치 않았다. 때마침 출장 관속(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의 전세를 관리하면서 능절조(能節租) 30석을 성안으로 운반하다가 죽지랑이 부하를 소중히 생각하는 작풍을 찬미하는 한편 익선의 벽창호 같은 태도를 비루하게 여겨 가졌던 벼 30석을 그만 익선에게 주면서 청을 들어주라고 권하였으나 그래도 승낙하지 않더니 또다시 사지(舍知) 진절(珍節)의 말안장까지 주니까 그제야 승낙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주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큰아들을 붙들어갔다. 때는 바로 동짓달도 매우 추운 날이라 성 안 못 가운데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곧 얼어죽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사람들을 모두 내쫓아서 다시는 관청에 발을 못 붙이게 하고 중(黑衣)이 못 되게 하며, 이미 중이 된 자라면 큰절에는 못 들어서도록 하였다. 또한 사(史)에게 명령하여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枰定戶) 자손(孫)을 삼아 이를 표창하였다. 당시 원측법사(圓測法師)는 동방에서도 도덕이 고명하였지만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중의 벼슬(僧職)을 주지 않았다.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竹旨郞)조>
한편 현장과 원측, 규기스님의 탑 감실에는 각각 소상이 모셔져 있다. 소상은 시신을 다비한 후에 나오는 뼛가루에다 진흙을 반죽하여 생전의 모습대로 만든 것이다. 신라에서도 한 때 소상제작이 유행하였는데 원효대사도 소상을 만들었고, 남산 염불사의 염불스님도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에 모셔두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보인다. 생전의 원측스님의 모습이 어떠한지 감실을 들여다보니 희미하나마 소상이 바라다보였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측사탑(測師塔) 수리기록
▲측사탑(測師塔) 수리기록
<2009.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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