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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蔥叟 2009. 7. 7. 08:50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함안박물관>

 

   사람뿐만 아니라 말(馬)에게도 갑옷을 입힌 기병을 중장기병(重裝騎兵)이라고 부른다. 중장기병은 마치 현대의 전차처럼 방호력과 충격력을 동시에 가진 특수한 병종이기 때문에 고대 전장에서 강력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중장기병은 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중국 등 세계 각국에 존재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략 4세기 후반부터 중장기병이 등장, 고구려를 시작으로 신라·가야에도 전파돼 수많은 전쟁에서 활약했다. 중장기병은 말에도 갑옷이 입혀져 있으므로 적이 쏘는 화살에 과감히 대응하면서 적진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군사력을 뒷받침한 핵심 병종 중 하나이다.

  

▲말갑옷(馬甲, 5세기)

 

   북한의 평안남도 용강군에 위치한 쌍영총, 남포의 약수리 고분, 평양의 개마총, 중국 지안(集安)현에 위치한 삼실총 등 고구려의 여러 고분 벽화에 당시 중장기병의 모습이 생생히 그림으로 남아 있다. 말갑옷(馬甲)은 말 얼굴에 씌우는 마면주(馬面胄)와 말 몸통에 입히는 마신갑(馬身甲) 등 몇 가지 부속으로 구성돼 있다. 비록 고분에 그림이 남아 있지만 고구려 고분에서 말갑옷 실물 유물이 출토된 사례는 없다. 하지만 영남 일대의 신라·가야 고분에서 마면주나 마신갑 실물이 여러 차례 출토됐다.

   특히 경남 함안에서 완전한 형태의 말갑옷이 1992년 6월6일 극적인 과정을 거쳐 출토된 바 있다. 신문 배달 청년 이병춘씨가 아파트 배수관 공사 현장에서 갑옷 조각을 발견, 문화재 관리 부서에 신고했다. 연락을 받고 현장을 찾은 창원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록 고분은 공사장의 포클레인에 의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됐지만 말갑옷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완전한 형태의 말갑옷 실물 유물이 발견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당시까지는 마면주만 출토되거나 경주·동래·합천 등지의 고분에서 말갑옷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갑옷 미늘 조각 일부가 출토된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함안에서 발견된 말갑옷은 머리·목·가슴·몸통 부분이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완전한 형태였다. 부위별로 갑옷 미늘의 크기를 달리해서 만든 것이다. 더구나 말의 얼굴을 가렸던 마면주도 별도로 놓여 있어 말갑옷으로 더 이상 완벽한 것은 없었다. 신문 배달 청년이 관심을 가지고 신고한 덕에 한국 고대 중장기병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말갑옷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2년 6월 6일.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던 현충일. 함안 가야읍의 한복판에서 아라국을 지키던 기마전사가 150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말산·도항리고분군 능선의 북쪽 끝자락에서 진행되고 있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의 일이었다. 아파트의 배수관 공사에서 굴착기로 땅을 파헤치는데, 퍼올려진 흙에서 토기와 철기가 함께 나뒹구는 모습을 마침 신문배달하던 고등학생이 발견하였다. 이 소식은 다행히도 역사학을 전공했던 지국장에게 전해졌고, 함안군청에 신고됨으로써 역사적인 마갑총의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말의 갑옷이 발견된 무덤이라 마갑총(馬甲塚)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갑총이 발견된 해동아파트의 현장과 말산·도항리고분군은 경전선의 철로를 사이에 두고 있어 별개로 보이기도 하지만, 같은 능선이 철로와 도로의 개설로 단절되었을 뿐이다. 마갑총 역시 아라국 왕릉묘역인 말산·도항리고분군의 일원으로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말산·도항리의 대형무덤들이 높은 곳에 위치한 석곽묘(石槨墓)인데 비해, 마갑총은 낮은 곳에 위치한 목곽묘(木槨墓)로서, 시대적으로 앞서는 인물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가야의 무덤이 목곽에서 석곽으로 변하였고, 낮은 데에서 높은 데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마갑총의 발견이 왜 역사적인가 하면, 마갑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고구려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고, 신라와 백제 그리고 다른 가야에서 조차 이렇게 완전한 상태로 출토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마갑과 마갑총의 주인공에 대한 추적을 통해 5세기 초에 광개토왕의 군대를 맞아 싸우던 아라국 전사의 모습이 되살려지고, 아라(安羅)와 왜(倭)의 연합군이 신라를 공략하고, 고구려가 신라 편에서 구원하던 고대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역사가 함안의 아라국을 중심으로 복원될 수 있다.

 

   물론 주인공 왼쪽의 마갑은 굴착기에 의해 절반 이상이 파손되었지만, 오른쪽의 갑옷은 완전하게 남았다. 말의 좌우 양쪽을 어깨에서 엉덩이까지 커튼처럼 드리우는 5, 6단짜리 2줄이 1벌을 이루는 데, 이런 모습은 북한 평양의 개마총(鎧塚)과 중국 집안의 삼실총(三室塚)과 같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는 그대로이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갑총은 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마갑총의 주인공은 이미 5세기 초에도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5세기 초라면 저 광개토왕릉비가 전하는 400년의 전쟁과 겹치는 시기이다.

 

   이 부분의 비문은 훼손이 심해 판독에 여러 가지 생각이 난무하기도 하지만,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돕게 하였고, 신라성에 도착한 고구려군이 왜군을 깨뜨리고, 달아나는 왜군을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를 치고, 아라국의 군사와 충돌하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아라(安羅)의 표기는 이 짧은 문장 속에서 3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비문의 '안라인(安羅人)'을 '신라인을 안치하다'로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광개토왕릉비가 한 문장에서 '안(安)'이라는 같은 동사를 3번씩이나 반복해 쓸 만큼 치졸한 문장이 아니다. 아라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3번씩이라도 반복해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5세기 중엽 함안의 마갑총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마갑의 실재를 보여주는 유일한 예이다. 그 실물이 유일하게 아라국 왕릉묘역에서 나왔다는 것은 400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획득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아라국 제작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자랑스럽게 전리품으로 보유하고 사용하던 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무덤에 넣어졌던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다. 이러한 아라국 기마전사의 모습은 김해에서 출토된 국보 275호 기마인물상토기와 거의 닮았을 것이다. 말의 좌우에 5단으로 된 마갑을 두르고 있는 기마전사의 모습이다. 
 

   말갑옷은 고대사회 기마병의 필수장구로서 적을 만낫을 때 말을 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마갑총 출토 말갑옷은 현재까지 말갑옷을 상태가 가장 양호한 상태로 조사된 곳이다. 5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되는  대형덧널무덤인 마갑총에서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출토된 예가 드문 5세기대의 말갑옷이 양호한 상태로 발견됨으로써 고대 기병용 마장 마구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에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2009.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