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
<함안박물관>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은 한국고대 목간의 보고이다. 성산산성에서는 지금까지 보고된 국내 고대 목간 350여 점 중 절반 가량에 육박하는 양이 출토되었다. 목간(木簡)이란 종이 대신 나무를 이용한 '나무 편지' 혹은 '나무 문서'다. 문헌기록과 금석문에 이어 제3의 사료(史料)로 각광받고 있다. 물론 바탕이 나무이므로 묵글씨나 새김 글씨로 쓰인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대체로 물품 꼬리표 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간단한 행정 명령을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일본에서는 궁성 보초병이 자기에게 할당된 식량을 담당 관청에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목간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목간(仇利伐 上彡者村)
▲목간(竹尸■乎 稗一)
성산산성에서 현재까지 출토된 신라목간은 대부분이 물품 꼬리표 용도인 하찰목간(荷札木簡)으로 해석되고 있다. 목간 제작 연대는 6세기 중후반 혹은 그 이전으로 추정됐다. 대다수의 목간 아래쪽에는 물품꼬리표로서의 용도를 짐작케하는 단서로 V자형으로 파여진 홈이 나있다. 다시 말해, 이들 목간은 신라 각 지방에서 징발한 곡물 가마니 등에 매달려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입증하듯 목간에는 지명(地名)과 인명(人名), 신라의 관위(官位), 곡물 이름 및 그 단위 등이 기재돼 있다. 곡물로는 '稗'(패), 즉, 피가 압도적인데 '麥'(맥)이라는 글자가 새로이 판독되어 보리 또한 포함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곡물 단위로는 '一'(일), 혹은 '一石'(한 섬) 등이 눈에 띈다. 또 '米十一升'(쌀 11승)이라고 해서 '米'(미.쌀)란 물품도 확인되었다. 이들 목간에는 '인명 + 負 + 稗' 혹은 '稗一石'(피 1섬)이라든가 "仇利伐(구리벌.지명) 仇陀知(구타지.인명) 一伐(신라 외위<外位> 8등급 벼슬) 奴人(신분) 毛利文(인명) 負"(구리벌에 사는 일벌 벼슬아치 구타지라는 사람에게 속한 노인인 모리문이 부담했다)와 같은 문구가 확인됐다.
▲목간(甘文本波■村旦利村伊竹伊)
▲목간(大村伸息知一伐)
負(부)란 부담했다는 뜻이며, 稗(패)는 벼 비슷한 곡물의 일종으로 피, 一石(1석)은 그 분량(혹은 중량)이 1섬이라는 뜻. 노인(奴人)은 그 정확한 실체가 오리무중이지만, 국가의 세금을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시대 사노비가 아니라, 특정한 집단 혹은 개인에게 예속된 존재이면서도 자율성이 어느 정도 확보된 신분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부 목간은 이런 형식에서 벗어나 있어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지명이나 인명 등만 나오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조선시대 호패처럼 신라사람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신분증이라고 보기도 한다.
▲목간(仇伐干好女村卑?部稗石)
▲목간(仇利伐 ■德知一伐奴人■)
목간은 무엇보다 당시 신라 지명이나 인명 및 신라 관위에 관한 많은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목간은 지금의 성산산성에 도착한 곡물 등이 어느 지방의 누가 얼마만한 분량으로 낸 것인지를 표시한 일종의 '바코드'였던 것이다. 지명으로는 기존에 확인된 及伐城(급벌성)ㆍ감문성(甘文城)ㆍ진성(陳城)ㆍ구리벌(仇利伐) 외에 古陀(고타)ㆍ추문(鄒文.단양적성비에도 등장)ㆍ巴珍兮城(파진혜성)ㆍ巴珍兮村(파진혜촌)ㆍ阿卜智村(아복지촌)ㆍ양촌(陽村) 등이 확인됐다.
예컨대 목간의 '陽村文尸只稗'라는 문구는 '양촌(陽村. 양지마을)이라는 마을에 사는 문시지(文尸只)라는 사람이 낸 피(벼 비슷한 곡물)'라는 뜻이다. 현재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 일대에 중심지가 있던 '감문성'(甘文城)이라는 지명이 재확인됐고, '下幾'(하기) 혹은 '下枝'(하지)로 판독되었던 현재의 경북 안동시 풍산 일대로 추정되는 지명이 '하맥(下麥)'으로 확실히 밝혀졌다. 더불어 '물사벌'(勿思伐)이나 '구벌'(丘伐) 등의 지명과 '매곡촌'(買谷村) 등의 경북 상주(上州) 지역 지명도 확인되었다.
▲목간(前谷村阿足只■)
▲목간(王松鳥多伊伐支貞員支)
인명으로는 波婁(파루)ㆍ居利支(거리지)ㆍ伊竹伊(이죽이)ㆍ巴兮支(파혜지)ㆍ구잉지(仇仍支)ㆍ阿那休智(아나휴지)ㆍ阿那舌只(아나설지)ㆍ內恩支(내은지)ㆍ居助支(거조지)ㆍ仇禮支(구례지) 등이 밝혀졌다. 인명에서 특이한 점은 두 가지. 첫째, 인명 23개 가운데 '지(智ㆍ知ㆍ只ㆍ支)로 끝나는 경우가 19개나 된다는 점이다. 둘째, 일부 이름에서 돌림자 흔적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阿那休智(아나휴지)와 阿那舌只(아나설지), 居利支(거리지)와 居助支(거조지)가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데 형제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관위로는 외위(外位) 8등과 9등인 '一伐'(일벌)과 '일척'(一尺)이 확인됐다. 또 그 실체를 두고 논란이 분분한 '奴人'(노인)이 추가로 확인 돼 여전히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노인'에 대해 현재까지 압도적 견해는 신라가 새로이 정복한 지역 주민을 편제한 신분의 일종이라는 것이나,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신라가 정복한 지역이 아니라 원래부터 신라 영역이었음이 확실한 지역민에 대해서도 엄연히 '노인'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보다는 '奴人'은 각종 도교경전에 나오는 것처럼 전문 장인 직종 등지에 종사하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목간(上吟乃村居利支稗)
▲목간(甘文城下幾甘文本■■■)
목간 중에는 503년 무렵에 건립됐다고 추정되는 신라시대 고비(古碑)인 영일 냉수리비에서 신라의 '전세이왕'(前世二王. 앞선 시대의 두 임금) 중 한 명의 이름으로 거론된 '○夫智王'의 '○'과 똑같은 글자가 확인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左 비슷한 글자에다가 斤이란 글자를 좌우에 나란히 세운 이 글자는 종래 '斯'(사)의 이체자(異體字. 발음과 뜻은 똑같으나 모양이 다른 글자)로 간주되기도 했으나, 다른 무엇보다 같은 냉수리 비문에 '斯'라는 정자체 글자가 여러 번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으로 평가된다.
목간 출토지는 당시 신라 변경에 속하는 지방이다. 주목할 점은 이런 변경 마을(혹은 도시)에 피나 보리 같은 곡물을 보낸 사람들은 다른 지방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목간에 적힌 지명의 현재 위치를 모두 알 수는 없으나, 감문(甘文.경북 김천)이나 고타(古陀. 경북 안동) 등지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지방 각지에서 출발한 곡물이 성산산성으로 집결됐음을 알 수 있다.
▲목간(及伐城秀乃巴稗)
▲목간(鳥欣弥村卜兮稗石)
왜 성산산성이었을까? 확정적인 증거는 없으나, 당시 신라로서는 이곳이 전략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인식됐을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곳이 옛 아라가야 중심지인데다 왜(倭)를 견제하는 군사적 거점지로 보기도 한다. 더욱 주목할 점은 적어도 목간만으로는 곡물의 이동이 물 흐름처럼 자연적인 것처럼 설정돼 있으나 이런 흐름을 강제한 막강한 권력이 뒤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권력은 말할 것도 없이 신라왕이 중심에 위치하는 국가권력이다.
다시 말해, 신라 중앙정부가 하달한 명령에 따라 감문이나 고타 등 각 지방은 국가에서 배당한 곡물을 공출해서 성산산성으로 보냈던 것이며, 이에 성산산성 현지에서는 배당된 곡물이 제대로 들어왔는지를 일일이 체크했던 것이다. 따라서 목간에는 중앙과 각 지방, 각 지방과 성산산성, 중앙과 성산산성이라는 3개의 문서 행정 중심 축이 작동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목간(仇阤■一伐 / 仇利伐 尒利只支■■)
▲목간(稗石)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시스템은 어떤 토대위에서 작동할 수 있었을까? 각 지방별로, 또 각 민(民)마다 국가가 곡물을 할당 수취해서 성산산성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호적이 있어야 한다. 어느 마을에 어떠한 사람들이 얼마나 살고 있는 지도 모르면서 국가 행정력을 발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신라라는 국가가 각 지방 및 모든 민(民)에 대해 거미줄 같은 통치망을 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덱스용'(책갈피용) 목간이 3점이나 확인된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인덱스용 목간'이 따로 있다는 것은 이런 목간이 사용된 행정문서를 대량으로, 한 군데다, 그것도 분류해서 관리한 문서 보관소가 별도로 존재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이렇게 모인 문서들이 일종의 호적대장 같은 구실을 했음을 엿보게 한다. 신라는 학계 통념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전 민(民)을 호적에 편제해서 관리하고 동원하며 공물을 징발할 정도로 고도의 국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목간(上彡者村波婁 / 仇利伐)
▲목간(仇仍支稗姜)
<2009.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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