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달구벌문화권

영천 광주이씨 시조묘

蔥叟 2009. 5. 8. 08:30

영천 광주이씨 시조묘

 

   조선조에서 우리나라 문벌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광주이씨 시조는 고려 말 인물인 이당(李唐)으로 영천 도유동에 그의 묘가 조성되 있다. 왕릉 못지않은 웅장한 규모에 주변 또한 말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당의 묘는 야자(也字)형의 큰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也"자는 어조사로서 천자문의 맨끝에 나오는 글자인데 이 글자의 중간 획에 해당하는 부위에 묘를 써 산천의 정기를 옳게 받아 큰 발음(發蔭)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묘 앞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왼쪽의 청룡 가닥은 낮고 짧은 반면 오른쪽의 백호 가지는 청룡 끝부분을 감싸 안을 정도로 힘차게 장회(長會)하였고 청룡과 백호 중간지점의 풍후(豊厚)한 혈장(穴場)에 묘를 조성하여 "也"자를 꼭 닮아 신비스런 인상을 받는다. 이당이 이곳에 묻히게 된 사연은 그의 둘째 아들인 둔촌 이집(遁村 李集)과 천곡 최원도(泉谷 崔元道)와의 참되고 아름다운 우정에서 연유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이당 묘소 전경

 

▲이당 묘소 전경

 

   천곡(泉谷)은 영천최씨인 원도의 호다. 그는 여말의 사람으로 요승 신돈이 득세해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 땅에 내려와 우거하고 있었다. 둔촌 이집과는 과거 동년생으로 절친한 친구였다. 어느 날 둔촌은 이웃에 살고 있는 신돈의 측근인 채판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 말이 신돈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이당 묘소

 

▲이당 묘소

 

   장차 닥쳐올 큰 화를 예견한 둔촌은 연로하신 노부를 등에 업고 영천 땅의 천곡을 찾아 낮에는 숨고 밤이면 산길을 택해 걸었다. 천신만고 끝에 몇 달이 걸려 도착한 천곡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이라 많은 인근주민들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있었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며 천곡을 찾았으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천곡은 반기기는커녕 대노(大怒)해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소리치며 오히려 내쫓았다.

 

▲이당 묘소

 

▲이당 묘소 호석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둔촌은 다시 노부를 등에 업고 정처 없이 그곳을 떠났다.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를 태워야 된다며 둔촌이 앉았다가 떠난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한편, 둔촌은 천곡에게 쫓겨나 산길을 걸으면서 천곡이 진심으로 자신을 쫓아낸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여 멀리가지 않고 길옆 덤불 속에서 밤을 맞고 있었고 천곡은 둔촌이 노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 손님들이 돌아가자 등불을 켜들고 산길을 더듬어 찾아 나섰다. 그는 산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둔촌 부자를 발견하고 서로 얼싸안으며 산을 내려와 밤이 깊은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해서 4년간에 걸친 다락방 피신생활이 시작되었으니 그때가 1368년(공민왕 17)이다. 천곡은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찬도 많이 담게 해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당 묘소 호석

 

▲망주석

 

   긴 세월동안 날마다 고봉으로 담은 밥을 먹어치우는 주인의 식욕을 의아히 여긴 여종 제비가 문구멍을 몰래 들여다보고 놀라서 안방마님에게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이 결국 천곡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함구령을 내린다고 과연 비밀이 보장될까? 그러나 그 방법밖에 없어서 식솔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에 비밀이 새는 날에는 양가가 멸망한다는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여종 제비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제비를 연아(燕娥)라고 적고 있다.

 

▲문인석

 

▲이당 묘소

 

   그 후 영천에 수색이 시작되어 천곡의 집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동리사람들의 증언으로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1369년 둔촌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비밀리에 치러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실로 컸다. 천곡은 자기의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의에 어긋남이 없이 빈염을 하고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천곡 모친묘

 

▲천곡 모친묘

 

   그 결과 최원도의 후손들은 번창하지 못한 반면 이당의 후손들은 대창(大昌)해서 그의 아들 5형제가 후손들에 의해 파조(派祖)로 추앙받게 됐으며 이인손, 이극균, 이극배, 이준경, 이덕형 등이 연이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그 중에서도 이인손(李仁孫)의 아들 다섯명이 모두 등과해 세상 사람들의 선망을 받기도 했다. 특히 이 광주이씨 중에서 야인(野人)과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고 중종 때에 영의정에 올라 출장입상(出將入相)한 이준경(李浚慶)과 이항복(李恒福)과의 재기 넘치는 교우로 일세를 풍미했던 이덕형(李德馨)은 학덕이 높은 명재상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또한 그 밖의 광주이씨들 중 많은 사람들이 대과에 합격했으며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많아 일약 명문거족이 됐다. 이 같이 광주이씨 가문이 대창하게 된 것은 이당의 묘를 큰 명당에 썼기 때문이라 하여 광주이씨들은 최원도의 큰 은혜를 잊지 않고 이당의 시제(時祭)때가 되면 근처에 있는 최원도 모친 묘에도 제사를 지내는 것이 관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무인석

 

▲무인석

 

 

 

                                                                               <200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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