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대비사 대웅전
청도 하면 보통 운문사를 흔히 떠올린다. 하지만, 청도에는 대비사라고 하는 오래되었지만 조용하고 아담한 절도 있다. 대비사(大悲寺)에는 예전에 세 가지 아름다움이 있었다. 대웅전과 부도밭과 시냇물 따라 찾아가는 길. 지금은 모든 게 변해버렸지만, 박곡리를 거쳐 대비사에 이르는 길은 한적한 산골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대비사로 가는 예전의 길은 마을을 지나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들면 나타나는 산길을 따라갔는데, 산과 나무와 햇빛과 졸졸거리는 시냇물이 어울려 있는, 잡목이 부스스한 조용한 산길이었다.
▲대비사 대웅전
▲대비사 대웅전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만 남기고 나머지 두 가지는 사라지고 없다. 지금의 대비못(大悲池)이라는 커다란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길은 파헤쳐졌고 나무가 잘려나갔으며 부도들은 깨지고 뽑힌 채 옮겨져 옛모습을 잃어버렸다. 비록 두 가지의 아름다움은 잃었지만 대비사에는 아직 한 가지의 아름다움이 남아있다. 대비사의 세 가지 아름다움 중 유일하게 남은 대웅전이 바로 그것으로, 지금도 대비사 대웅전(보물 제834호)은 여전히 그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대비사 대웅전은 '맞배지붕에는 공포는 주심포'라는 일반적인 공식을 무너뜨리고,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공포는 다포계의 구성을 보이고 있어 이채롭다. 그리고 앞뒷면에만 짜인 공포 또한 번잡하지 않고 고풍스럽다. 흠이라면 측면으로 내민 뻘목이 너무 짧아 풍판이 바짝 달라붙어 버린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단아하면서도 그윽한 건물이 다소 채신없어 보인다.
▲대비사 초석
▲대웅전 공포
대웅전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후면 고주(高柱)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고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걸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모셨는데, 겉모습을 보아선 숙종 연간에 대웅전이 중수될 때 같이 조성되었거나 아니면 조금 후대인 영정조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조선 숙종 44년(1718) 채헌(彩軒)이 지은 「경상도청도군동호거산운문사사적(慶尙道淸道郡東虎踞山雲門寺事蹟)」에 의하면 대비사(大悲寺)는 567년(신라 진흥왕 28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니 꽤 오래된 절이다. 창건 당시에는 절의 이름을 소작갑사(小鵲岬寺)라고 하였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557년 한 신승이 운문산에 들어와 현재의 금수동(金水洞) 북대암(北臺庵) 자리에 초암을 짓고 수도하였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산과 계곡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들이 놀라 울었다.
신승은 이때 이 산에 오령(五靈)이 살고 있음을 알고 7년에 걸쳐 5개의 사찰을 지었는데, 산 중앙에는 대작갑사(大鵲岬寺), 동쪽에는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는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는 소작갑사, 북쪽에는 소보갑사(所寶岬寺)를 각각 지었다. 이 중 대작갑사는 지금의 운문사(雲門寺)의 옛이름이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 삼존불과 후불벽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다른 사찰들처럼 대비사에 관한 기록도 매우 적다. 임진왜란 당시 청도는 왜구에 의하여 점령되어 운문사 일대는 소실되었고, 대비사 역시도 화재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비사 대웅전 불단 내부의 묵서를 미루어 볼 때 숙종 연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6.25동란 후 응교화상(應敎和尙)을 화주(化主)로 허물어져 가는 대웅전과 경내를 정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대웅전 수미단 조각
▲대웅전 수미단 조각
▲대웅전 수미단 조각
<2009.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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