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을 찾아서 - 경주 금강산 백률사 석당(石幢)
<국립경주박물관>
불교는 삼국시대인 4세기에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소개되어 사람들이 불교를 알고 믿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 신라에 처음 불교가 알려진 지 백년이 지난 법흥왕(法興王) 때까지도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법흥왕의 뜻을 알고 공식적으로 불교를 인정하도록 도운 이가 이차돈(異次頓)이다.
▲석당
이차돈은 신라의 전통 신앙에 몰두되어 있던 귀족층들의 반발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교를 공인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자 비상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자신이 국가의 공식적인 허락도 없이 절을 짓는 등 불법을 행하였으니 그에 마땅한 벌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대신 자신이 죽을 때 보통 사람들이 죽는 것과 다른 일이 생긴다면 이는 불법의 영험함으로 인한 것이니 의심 없이 불법을 믿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법흥왕은 불법을 널리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무고한 인명을 희생할 수는 없다고 이차돈을 말렸다 그러나 이차돈의 뜻은 너무도 확고했고 마침내 왕과 뭇 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그랬더니 붉은 피가 솟아나는 대신 흰 우유같은 액체가 한 길이나 하늘로 솟구쳤다. 사방 하늘이 깜깜해져 태양은 빛을 감추고 온 땅이 진동하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 법흥왕은 눈물이 옷을 적셔 흘러내리게 애통해하였고 반대하던 재상들은 걱정이 커져 진땀이 머리의 관모를 따라 흘러 내렸다. 샘물은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 오르고 곧게 서 있던 나무가 부러지고 산짐승들은 떼지어 울어댔다. 이차돈과 뜻을 같이 하던 동지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쳐다보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공중으로 솟아 오른 이차돈의 머리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고 도성 북쪽에 있는 금강산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곳이 신성한 곳이라고 생각하여 절을 지어 백률사(栢栗寺)라고 이름지었다. 얼마 뒤 이 절 바로 밑에는 땅에서 파낸 사면석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차돈이 불법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기원하며 목숨을 바친 지 3백년이 지난 때 사람들은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자 함께 모여 일을 준비했다. 527년(법흥왕 14년)에 이차돈이 순교했고, 비를 세운 것은 818년(헌덕왕 10년)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여섯모난 기둥같은 빗돌에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새겨 길이 기념하려는 것이었다. 가운데 면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새겼다. 두 손을 맞잡고 바르게 서서 머리를 내민 이차돈의 몸은 이미 머리가 몸에서 떠나 있다. 머리는 몸에서 햇살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발 앞에 떨어져 있다. 사방에는 꽃이 휘날려 떨어지고 대지는 파도처럼 진동하여 온 천지자연이 모두 이차돈의 숭고한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2009. 1.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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