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서악리 고분군(西岳里古墳群)
무열왕릉 서쪽의 동향한 능선에는 거대한 4기의 원형분구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 고분들은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릉고에서 제일 윗쪽의 1호분부터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으로 추정한 이후 약 200여년간 신라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느 왕의 능인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서악리 고분군
▲서악리 고분군
추사는 1817년과 1824년에 경주를 방문한 바 있다. 이때 그가 경주를 방문한 목적은 금석문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사신행렬로 가서 당시 금석학의 대가였던 청의 옹방강과 옹방원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청에서는 고증학으로서의 금석학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금석문은 문헌자료의 일부로 깨닫고 있었으며 비문을 판독하여 역사를 복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비문의 탁본을 통하여 서체공부자료 정도로 활용하는 단계였다.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계 홍양호도 비문판독을 많이 했으나 내용은 공부하지 않고 서체 연구에만 몰두했었다고 한다.
추사가 1824년 두번째로 경주를 방문했을 때에는 창림사 무구정탑원기를 판독하였고 동경잡기 등을 참고하여 서악동 고분군을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으로 추정하면서 무열왕보다 후대의 왕인 문성왕릉과 진지왕릉이 무열왕릉보다 위에 위치한 사실에 대하여 도장지법(倒葬之法, 逆葬)을 신라인들은 싫어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文聖憲安俱係太宗後 不當在太宗陵上 而倒葬之法 後人所忌 古則不然.
문성,헌안은 모두 태종의 뒤에 있던 임금이니 태종릉 위에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겠으나, 도장의 법식은 후세 사람들이 피하였던 것이고, 옛날에는 곧 그렇지 아니하였다.
<추사집 진흥왕릉고>
▲서악리 고분군
▲서악리 고분군
그 후 1984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강인구는 23대 법흥왕릉,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그리고 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 즉 문흥대왕릉으로 추정하였다. 이렇게 추정한 근거는 이 들 고분이 입지적으로 무열왕릉 직후방에 상하 일렬을 이루고 있는 점, 봉토의 규모가 신사시대 왕릉 가운데서도 최대형에 속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단순한 왕족의 묘는 아니며, 능묘 조영 순서상 무열왕 자손들의 묘가 이와 같은 규모를 갖추고 무열왕릉 상위에 위치할 수 없으며, 또 무열왕의 선대는 아버지 김용춘과 어머니 천명부인만이 각각 문흥대왕과 문정태후로 추봉되었고 조부는 진지왕이므로 달리 추봉되어야 할 조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분의 규모로 보아 왕릉임이 분명하며 봉분의 높이로 볼 때 4호분이 가장 크며 위로 올라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즉 4호분은 천마총과 비슷한 규모로 높이가 12m, 지름 50.9m, 3호분은 높이 10m, 지름 60m, 2호분은 높이 8m, 지름 40m, 호분은 높이 8m, 지름 39m이다. 이 같은 사실은 능의 조성시기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나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 경주 월산리 고분군등은 아래에서 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묘인 경기도 장단의 율곡선생묘도 부친인 이원수의 묘보다 위에 있으며 함양의 정여창 묘 또한 부인의 묘가 위에 있다. 즉 조선 후기 족보를 제작하고 입향조가 생기고 선산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이처럼 산 아래에서 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묘를 축조해왔던 것이다.
▲서악리 고분군
▲서악리 고분군
신라의 왕들은 언제까지 금관을 사용하였느냐는 문제는 바로 적석목곽분의 소멸시기와 일치한다. 이는 다시말하면 횡혈식석실분의 등장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비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三十六年, 春二月, <永興寺>塑佛自壞, 未幾, <眞興王>妃比丘尼死.
36년 봄 2월, 영흥사의 흙으로 빚은 불상이 저절로 훼손되고, 얼마 후에 진흥왕의 왕비였던 비구니가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진평왕 36년조 기사>
○三十七年 王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
왕비도 역시 이를 본받아 중이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 기사>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왕비의 죽음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삼국시대에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승려들 조차도 화장은 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염불사조의 염불스님도 죽은 후 육할 한 후에 뼈를 갈아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에 모셔두었으며, 선율스님의 경우에도 남산에 매장한 것으로 나와있다. 단 화장을 한 경우는 단명한 왕이거나 병사한 왕인 경우에 한하였다.
▲서악리 고분군
▲4호분
신라왕의 장지가 평지에서 산으로 옮겨간 시기는 기존 고고학에서는 법흥왕릉부터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법흥왕의 장지가 애공사북봉이라고 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지증왕릉 역시 평지가 아닌 산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만은 없다. 일반적으로 적석목곽분은 평지에 있으며 내부의 목곽이 썩으면 봉분의 정상부가 내려앉아 꺼지게 된다. 하지만 서악리고분군의 봉분은 정상부가 꺼지지 않았다. 적석목곽분이 아니라 횡혈식석실분이라는 증거이다. 석실분이 도입된 이후에도 내부구조만 바뀌고 규모는 적석목곽분 시절과 동일하게 만들었으며 합장이 아닌 단독장을 한동안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법흥의 율령반포 이후 능과 묘가 분리되고 능역도 따로 조성하는 전통이 새롭게 마련된다. 하지만 왕릉의 규모는 기존 적석목곽분의 규모를 유지한다. 또한 서악리 고분군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능역이 분리되지 않고 공유하고 있어 평지에 쓰던 무덤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무덤의 정면이 동쪽이며 무덤 밖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제사는 무덤의 정면에서 지내야 하는데 정면인 동쪽에는 공간이 없다.
▲3호분
▲2호분
마지막으로 애공사와 영경사에 대한 문제이다. 서악리 1호분 남쪽 정면에 기와와 전돌이 출토된 바 있어 이곳이 애공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법흥왕릉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애공사북쪽에, 진흥왕의 경우 역시 애공사북쪽에 진지왕의 경우 삼국사기에는 영경사북쪽에 삼국유사에는 애공사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치가 확실한 무열왕릉은 삼국사기에는 영경사북쪽에, 삼국유사에는 애공사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애공사 옆에 영경사가 있어야 한다.
고신라시대에 남성의 이름에는 존칭의 의미로 '지(支)'자를 붙였다. 이르태면 박알지(朴閼支-박혁거세), 김알지(金閼支-김씨 성을 가진 어린아이), 김무력지(金武力支-김유신의 할아버지) 등이다. 이것이 중국문화가 들어오면서 중국식으로 바뀌어 지(支) 대신 공(公)자를 쓰게 되었다. 그렇다면 애공사는 어떤 성격의 절이었던가? 진흥왕의 장자이자 태자였던 동륜은 일찍 요절하였다. 진위논쟁이 치열한 화랑세기에 의하면 아버지인 진흥왕의 여자를 범하려고 궁궐 담을 넘다 개에게 물려서 죽었다고 한다. 애공사는 진흥왕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의 명복을 빌고자 창건한 사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호분
▲2호분
동륜태자가 죽자 그의 동생인 사륜이 태자가 되었고 진흥왕이 죽자 사륜은 진지왕으로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동륜의 아들인 백정은 3년만에 정란황음(政亂慌淫-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하다)을 이유로 진지왕을 유패시켰다가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자신의 아버지 동륜태자를 위하여 지은 애공사를 영경사(永敬寺-영원히 공경한다)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후 진평왕, 선덕왕, 진덕왕 시대를 거쳐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태종무열왕이다. 무열왕은 영경사를 다시 애공사로 격을 낮춰 고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공사는 영경사와 같은 절이 된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사명이 바뀌는 경우는 애공사 외에도 많이 있다.
이제 서악리 고분군의 피장자를 알아볼 순서다. 첫번째 가능성은 4호분부터 지증왕릉, 법흥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두번째 가능성은 역시 4호분부터 법흥왕릉, 법흥왕비릉, 진흥왕릉, 진지왕릉으로의 추정도 가능하다. 어느쪽이건 간에 서악리 고분군은 법흥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임에는 틀림없고 다만 남는 하나의 능의 주인으로 지증왕, 법흥왕비 중 한명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1호분
▲4호분
<2008. 10. 11>
'◈한국문화순례◈ > 서라벌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김인문묘(傳金仁問墓) (0) | 2008.11.11 |
---|---|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0) | 2008.11.10 |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문성왕릉(傳文聖王陵) (0) | 2008.11.08 |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헌안왕릉(傳憲安王陵) (0) | 2008.11.07 |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진지왕릉(傳眞智王陵) (0) | 2008.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