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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용강동 출토 문관상토용(文官像土俑)

蔥叟 2008. 10. 24. 00:55

경주 용강동 출토 문관상토용(文官像土俑)

   

   토용은 무덤의 부장용(副葬用)으로 만든 토제의 인물상(人物像)을 말하는데, 넓은 의미에서는 인물상과 같이 부장된 동물과 기물(器物)도 포함한다. 토용은 원래 순장노예의 모사품으로 만들어졌다. 중국 상대(商代)와 서주(西周)시대에는 사람의 순장이 유행하였는데, 춘추시대 이후 대량의 노예 순장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사람을 본떠 만든 토용이 등장하여 이를 무덤에 순장하는 새로운 습속이 유행하였다. 처음에는 풀이나 짚으로 엮어 만들었으나 이후 흙과 나무를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의 토용은 신라에서 그 예가 보이며, 고려시대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오면 명기(明器)라 하여 실물보다 작은 크기의 백자로 만든 인물·동물·생활용기 등을 만들어 무덤에 부장하기도 하였다.

 

   1968년에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돌방무덤[석실고분(石室古墳)]에서는 토용이 돌방 네 구석에 놓여진 상태로 발견된 바 있고, 경주 시내 용강동과 황성동의 통일신라시대 돌방무덤에서도 시립(侍立)하거나 태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문관상(文官像)·병사상(兵士像)·여인상·서역인상(西域人像)과 수레바퀴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흙인형)에서도 페르시아인 등 서역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경주 용강동 석실분(8세기)에서 나온 문관상은 홀()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긴 턱수염과 얼굴 모습이 페르시아인의 풍모다. 그 분위기는 괘릉을 지키는 페르시아 무인석과 사뭇 다르다. 무시무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이다. 홀은 옛 관리들이 왕을 만날 때 손에 쥐는 물건이다. 이 홀을 들고 있다는 것은 1200여년 전 페르시아인들이 그 먼 곳에서부터 경주 땅으로 들어와 신라의 관료로 일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문관상 토용

 

 

 

<2008.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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