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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보원사터(普願寺址)

蔥叟 2008. 9. 7. 06:41

서산 보원사터(普願寺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보원사는 통일신라~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다. 이 절터에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던 것을 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신라, 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이다. 유물로는 백제게의 양식적 기반 위에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석탑, 통돌을 장�형으로 파내어 만든 한국 최대의 석조, 법인국사의 부도인 보승탑과 탑비 그리고 사찰에 불교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괘불을 걸기 위해 만든 당간지주가 있다. 특히 주변에 서산마애삼존불이 위치하고 사역에서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어 그 창건시기를 백제시대까지 올려볼 수 있다. 

 

▲보원사터 징검다리

 

▲보원사터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 창성탑에 "체징(體澄, 보조선사)이 보원사에서 수구(受具)했다(827)"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원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고, 그후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화엄종을 주종파로 하는 큰 사찰 중에서 보원사를 언급하고 있다(904). 고려사(高麗史)에는 보원사 계단(戒檀)에서 경율시험을 봤다는 기록이 있고(1036),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1530)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고 하여 16세기까지 그 사세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 보원사에서 만들어진 묘법연화경 등 각종 불교경판은 지금도 개심사에 보관되어 있다.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인 호산록(湖山錄, 1619)에는 강당사(講堂寺)로 기록되었고 법당은 이층고각(二層高閣)이며 부도전, 나한전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호서읍지(湖西邑誌1871)에는 철조여래좌상의 양손이 없다고 기록되어 19세기 후반부터 사세가 기울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10년대 사진에는 석조물과 민가만이 확인되고 있다. 이후 1959년에 서산마애삼존불, 1968년에는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보원사터

 

▲금당터

 

   오층석탑 서쪽에 위치한 금당터는 기단 한 변의 길이가 21.8m, 5칸의 정방형 건물터로 현재 2단의 기단석이 남아 있다. 가장 잘 남아있는 서편 기단석이 2단까지, 최대 높이는 약 88cm이다. 남서편과 북서편 모서리에는 모서리기둥이 마련된 기단석으로 확인되었다. 금당터 내부에는 자연 상태의 대형할석을 그대로 사용한 초석이 5개, 적심시설 8개가 확인되었다. 서측 유구들은 잘 남아 있었으나 동측 유구들은 많이 유실되었다. 서측에 남아있는 적심과 초석으로 미루어 어칸은 4.8m, 협칸과 퇴칸은 각각 4m와 2.3m 규모이다. 조선시대 수막새, 범자문암막새, 16~19세기의 백자류가 내부에서 출토되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건물터로 추정된다. 조사 도중 초석 상면보다 낮은 높이에 위치한 불상대좌가 건물지 서측에서 확인되었다. 지대석 상면에는 하층면석의 받침이 호각형으로 다듬어져 마련되었고 하층면석의 남,북,동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었다. 방형 건물터 서편기단석 바깥쪽 아래에서 또 다른 건물터의 지대석과 기단면석이 계단시설과 함께 확인되었는데 현재까지 이 건물터는 불상 대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불상대좌의 서편, 남편 그리고 북편 지대석에서 각각 7.2m로 동일하게 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편기와, 고려시대의 청자, 연봉 등이 확인되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대좌

 

▲불대좌 안상

 

 

 

<2008.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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