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은 높이 346cm로 원래는 무릎 이하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60년에 신도들이 발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괴량감(塊量感)이 넘치는 신체, 평판적인 상체, 좀 어색한 자세이면서 네모진 얼굴 등에서 그 당시의 서 있는 불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단판복련(單瓣覆蓮)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거구(巨軀)의 석불로 신체비례는 4등신(四等身) 정도로 유아와 같은 비례이다. 길다란 직사각형을 세운 듯한 신체에는 굴곡이 별로 없어 전체적으로 평면적이며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둥글넓적한 얼굴에는 내적 평화가 깃든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나발(螺髮)이 뚜렷한 육계는 높이가 낮아졌으나 통일신라말기의 불상들에서처럼 머리와 구별하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다. 목은 굵고 짧으며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어깨의 폭은 비교적 좁아서 움츠러든듯한 느낌을 주며 신체에 바짝 붙여 조각된 오른팔은 왼팔과 마찬가지로 짧고 두툼하며 손으로 옷자락을 살짝 쥐고 있다. 왼손은 기형적으로 보일 만큼 가슴에 붙여 조각되어 있는데, 엄지와 새끼 손가락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안으로 굽힌 채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변형된 여원인(與願印)으로 짐작된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입었는데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옷주름은 허리까지는 평행으로 내려오다가 허벅지 부분에서 Y자 모양으로 갈라져 동심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옷주름 표현은 719년에 조성된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의 형식에서 변형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하나의 양식이 자리잡고 난 후 다양한 양태로 변화·발전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신체와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사실감이 줄어들고, 얼굴도 넓적해지고, 조각수법도 섬세한 묘사력이 떨어지는 등 도피안사상(到彼岸寺像)이나 축서사상(鷲棲寺像)과 같은 9세기 무렵의 조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활기찬 미소를 띤 풍만 괴량감을 지닌 얼굴에서, 당대의 거구불상에 나타난 뛰어난 조형성을 말해주는 대작으로 평가된다.
▲석조여래입상
▲석조여래입상
▲석조여래입상
▲석조여래입상 상반신
▲석조여래입상 상반신
▲석조여래입상 하반신
▲석조여래입상 상호
▲석조여래입상 상호
▲석조여래입상 상호
<2008.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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