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탈해왕릉(傳脫解王陵)

2008. 6. 9. 08:0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탈해왕릉(傳脫解王陵)

 

경주 동천동 금강산 기슭에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능이라 전하는 고분이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석탈해왕은 서기 80년에 사망하였다. 이 시기는 목관묘를 만들던 시기였다. 1974년에 이 무덤이 도굴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경주박물관장이었던 정양모 선생이 조사한 결과 횡혈식 석실분이었음이 밝혀졌다. 석실분은 6세기 전반에나 나타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묘제이다. 기원전후부터 AD350년까지는 이른바 토광묘를 쓰던 시기인데 봉분이 작아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 평지화되어 육안으로는 발견하기가 어렵고 토목이나 건축 공사 도중에나 발견되는 묘제이다. 이 고분은 약 100여년 전에 석씨문중에서 석탈해 왕릉으로 지정했다.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조선시대 후기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던 당시에는 석탈해왕릉은 없었다. 탈해왕을 모시고 제사지내던 숭신전은 반원성 안에 있었다. 세종대왕의 어명으로 국가에서 세우고 관리하던 박혁거세의 사당인 숭덕전을 보고 경주 김씨는 숭혜전을 석씨들은 반월성에 숭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남산의 소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석탈해왕의 능이 없어 호공의 집을 탈해가 빼앗았다는 설화에 근거하여 반월성에다 숭신전을 세우고 성안에 석씨들이 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반월성 정비로 인하여 현재의 자리로 숭신전을 옮겼다.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그가 성안의 살 만한 땅을 찾아보니 초승달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있음을 바라보고 그 지세가 오래 살 만한 자리인지라 곧 내려가 알아보았더니 이는 호공(瓠公)의 댁이었다. 그는 곧 꾀를 써서 남몰래 그 집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는 이튿날 아침에 그 집 문앞에 와서 말하기를, “이 집은 우리 할아버지적 집이다”라고 하니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시비를 따지다가 결판을 못 내고 결국 관가에 고발하였다.

 

관리가 말하기를, “무슨 증거가 있기에 이것을 너희 집이라고 하느냐?” 하니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지방으로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여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사실을 밝혀주소서” 하여 그 말대로 파보니 과연 숯이 나왔으므로 곧 빼앗아 살았다. 

          

 <삼국유사 제4대탈해왕(第四代脫解王)조>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탈해왕릉은 애초부터 없었다.

 

王崩. 水葬未召疎井丘中. 塑骨安東岳. 今東岳大王

왕이 죽으니 미소천구중에 수장하였다. 소상을 만들어 동악에 안치하니 지금의 동악대왕이다.

 

<삼국유사 왕력 제4탈해니사금조>

 

   처음 왕이 죽었을 때는 수장하였으니 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탈해의 뼈는 처음에 반월성에 있었다. 문무왕 때 무덤의 뼈를 꺼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사당을 짓고 그곳에 모시고는 동악대왕이라 불렀으며, 그후 고려시대까지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석탈해왕릉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탈해 신령의 명령이 있어 “내 뼈를 조심해 묻으라”고 하였다. 그의 해골 둘레가 3척 2촌이요, 몸뚱이뼈 길이가 9척 7촌이요, 이빨이 엉켜 있어 하나인 듯하고 뼈마디가 모두 연결되어 있었으니 소위 천하에 적수가 없을 장사의 뼈였다. 그 뼈를 부수어 그의 형상을 빚어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셨다. 탈해의 신령이 또 이르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두라”고 하였으므로 그곳에 모셨다. 다른 말에는 그가 죽은 후 27대 문무왕 때인 조로(調露) 2년 경진(680) 3월 15일 신유 밤에 태종에게 현몽하여 얼굴이 무섭게 생긴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다 내 뼈를 소천 둔덕에서 파다가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 하였다. 왕은 이 말대로 좇았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나라에 제사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제4대탈해왕(第四代脫解王)조>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하지만 이때까지 왕릉이 없어 놀림감이 된다고 생각한 석씨문중에서는 왕릉 찾기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석씨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착안하였다.

 

○二十四年, 夏四月, 京都大風, <金城>東門自壞. 秋八月, 王薨. 葬城北<壤井>丘.

24년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왕조>

 

석탈해왕 당시에 서라벌에는 금성이 있었고 동국여지승람이나 동경잡기에 경주부 동쪽 5리에 금성이 있다는 기록에 따라 현재의 전랑지를 금성이라 여기고 전랑지 북쪽의 무덤이 석탈해왕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는 전랑지 일대를 '양정구'라 선전하고 길 이름도 '양정로'라고 붙였다.

 

이처럼 고고학적인 분석결과와 전혀 맞지 않는 6세기 후반의 석실분을 1세기 후반의 석탈해묘로 지정이 되었지만 석씨문중에서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춘추향대제를 지내고 동족임을 확인하고 있다.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전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2008.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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