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경애왕릉(傳景哀王陵)

2008. 5. 24. 00:4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경애왕릉(傳景哀王陵)

 

   남산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麟川;기린내)의 동안(東岸) 서남산 기슭에 재위 4년 포석정에 遊宴(유연)할 때 불의에 견훤의 습격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경애왕의 능으로 전하는 고분이 있다. 삼릉에 가까이 있으면서 혼자 있는 까닭으로 독릉(獨陵)이라고도 부른다. 밑 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의 평범한 원형토분이다. 규모로 보아 신라왕릉 가운데 작은 왕릉에 속한다. 표면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능 앞에 석상(石床)이 있으나 이는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고 봉토가 일반묘보다는 크므로 왕릉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경애왕의 최후와 당시의 국세가 재기할 수 없을 만큼 기울었다는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왕릉으로서는 빈약한 편이다. 앞에서 보았던 삼릉과 같이 조선 영조 6년(1730)에 새로이 지정된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 왕릉은 비록 묘제가 적석목곽분에서 횡혈식석실분으로 바뀌었지만, 크기는 일정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고분들은 왕릉에 비하여 규모가 눈에 띄게 작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왕권의 강화와 관련이 있어보인다. 다시 말하면 마립간 시기의 연맹적 성격에서 법흥왕 이후 왕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구조로 성격이 바뀌면서 고분에서도 이러한 의식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경애왕릉의 경우도 규모로 보아 왕릉으로 보기에는 작아 보인다. 삼국사기에서 경애왕의 장지를 해목령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삼릉 아래의 현 경애왕릉을 지정한 것일까? 그 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있었다.

 

○<景哀王>立. 諱<魏膺>, <景明王>同母弟也.

경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위응이며, 경명왕의 동복 아우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

 

○擧前王屍, 殯於西堂, 與群下慟哭. 上諡曰<景哀>, 葬<南山><蟹目嶺>.

왕(경순왕)은 전 왕(경애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조>

 

   즉 경주 박씨들은 경애왕을 경명왕의 동복아우(同母弟)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주목하여 조선후기의 가족묘 공간구성 원리를 그대로 적용한 까닭이다. 그럼 경애왕릉은 어디에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경애왕릉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葬南山蟹目嶺)'고 했으니 해목령에서 능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해목령은 북남산의 서봉을 가리키는데 남산성 서쪽의 봉우리이다. 한때 학계에서는 현재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기도 했다. 그것은 현일성왕릉이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왕릉 양식에 적합하며 해목령이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목령과 해목령이 바라다보이는 곳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해목령에서의 거리도 2~300m정도 떨어져 있어 이곳을 해목령이라 하기에는 부적합하다. 현재의 경애왕릉은 인접한 삼릉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왕족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전경애왕릉(傳景哀王陵)

 

▲전경애왕릉(傳景哀王陵)

 

▲전경애왕릉(傳景哀王陵)

 

▲전경애왕릉(傳景哀王陵)

 

▲전경애왕릉(傳景哀王陵)

 

 

 

<2008.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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