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22. 07:39ㆍ◈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
남산 서록 나정에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저수지가 있고, 안쪽 언덕 위 숲 속에 신라 6대 일성왕릉이라고 전해지는 왕릉이다. 이 능은 1730년에 경주지역 왕릉이 17기가 늘어날 때 일성왕릉으로 지정된 것이다. 이때 17기의 왕릉이 지정되기 전에 숙고의 기간이 있었다. 조선 숙종 연간인 1685년에 경주김씨, 1689년에 경주 박씨 문중에서 족보를 제작한 후 4~50년이 지난 후 왕릉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
이후 족보는 양반가의 출판문화로 등장하게 되었다. 최초로 족보를 제작한 것은 성종 연간인 15세기에 안동김씨가 처음으로 제작하였는데 주로 외손들이 주도하였다. 특이한 것은 부계와 모계를 모두 만든다는 점이다. 조선조 사회의 재산상속 지향점은 장자상속이었다. 이는 중국의 예법이었다. 하지만 조선전기사회에서는 자손균분에 윤회봉사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처가살이가 보편적인 것이었고 외손들이 집안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뿌리찾기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이때부터는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부계중심의 족보를 제작하였고 뿌리찾기를 시작하였다. 시조를 찾게 되고 중시조, 파조, 입향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짜족보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족단합을 통하여 집안의 세를 과시하고자 했으며 족보를 증명하기 위한 시조 무덤찾기가 시작되었다.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
그런데 이때 만들어진 족보의 시조들이 대부분 신라 경순왕이거나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공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산송(山訟)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는 모두가 서로 주인 없는 무덤이 자기 조상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조선초기에는 양반도 4대까지 벼슬을 하지 못하면 양반에서 이탈되었는데 임진왜란 후에는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으로 자리잡았다.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아래에 경주박씨와 경주김씨들의 왕릉이 지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김씨들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장지관련 기록이 있는 왕릉들만 지정한데 비하여 경주박씨들은 장지관련 기록이 있는 왕릉은 물론이고 관련기록이 없던 왕릉까지 포함하여 10기의 왕릉을 모두 지정하였다. 이때 지정된 왕릉이 오릉을 위시하여 6대 지마왕릉, 7대 일성왕릉, 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55대 경애왕릉이었다.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
영조 6년 경술년(1730)에 경주부윤 김시형(金始炯)이 전승(傳承)을 잃어 버린 왕릉을 찾는 작업을 행하면서 박씨문중과 타협하여 남산을 기준으로 하여 동남산에 위치하고 있는 능들은 김씨왕릉으로 서남산일대에 있는 능들은 박씨왕릉으로 하였다고 한다. 즉 오릉을 중심으로 남산 서록의 무덤을 모두 박씨왕릉으로 지정하였던 것이다.
▲전일성왕릉(傳逸聖王陵) 입구의 저수지. 구지제가 아닐까?
전일성왕릉에서 바라보면 남산의 해목령이 바라다 보인다. 한 때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이 무덤을 경애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해목령이 바라보인다는 것과 해목령과는 의미가 다르다. 오히려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고 뼈는 구지제 동쪽 산 옆구리에 묻었다(火葬獅子寺北骨藏于仇知堤東山脇)'는 효공왕릉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능의 앞쪽에 제방을 쌓아 만든 저수지가 있어 기록과도 부합하고 있다. 능의 양식으로 보아도 신라 말기의 무덤으로 시대적으로도 부합한다.
<2008.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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