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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금령총 출토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蔥叟 2007. 10. 22. 08:10

경주 금령총 출토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국립경주박물관특별전>

 

   이 기마인물형토기는 1924년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에서 발굴되었다. 금령총은 6세기경의 고신라시대의 적석목곽분으로 내부에서 금관과 금제호리띠, 유리잔 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왕족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이한 점은 금령총의 금제 허리띠의 길이가 다른 것들과 달리 무척 짧아서 이 무덤의 주인이 일찍 죽은 왕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마인물형토기는 말을 탄 사람을 형상화한 조각처럼 보이지만, 이 토기는 신라 왕실에서 술이나 물을 따르는 데 쓰던 주자(注子)이다. 말 등의 깔때기로 액체를 넣고, 말 가슴의 대롱으로 액체를 따르도록 되어 있다. 말 내부도 비어 있어 240cc 정도의 액체를 담을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은 이처럼 말을 이용한 독창적인 주자를 만들었는데, 왜 말(馬)을 디자인에 응용했을까? 이는 말이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옛 부덤에서는 말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토기와 함께 하인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의 기마인물형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손에 방울을 들고 있다. 앞장서서 주인을 안내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발견 당시 하인상이 주인상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말은 오랜 진화를 거쳐 약 200만년 전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알 수 있늣이, 말은 구석기시대에는 사냥감이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말을 기르기 시작하고, 말을 타게 되면서 인류의 활동 무대는 비약적으로 넓어졌다. 옛 문헌에도 말은 자주 등장한다. "기원전 109년 고조선이 중국 한(韓)에 말 오천 마리를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벌써 말을 대량으로 길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에도 말이 등장하며, 삼국이 기병을 앞세워 전쟁을 벌인 기록도 많이 있다. 또한 말을 조직적으로 기르는 관청도 있었는데, 신라 문무왕 때(669년)에는 왕실과 귀족들이 174개의 목장을 관리하였다고 한다. 백성들은 한 가구 당 말 1.5마리를 소유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부터 말을 길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말과 관련된 유물도 많이 발굴되었다. 약 2천년 전 원삼국시대의 제갈 및 말의 형상을 한 허리띠고리 등이 발굴되었고, 삼국시대에는 발걸이나 말안장 등 본격적인 말갖춤이 여러 유적에서 조사되어 이 때에는 이미 말을 타는 것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에도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투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경주 사리리 무덤에서 출토된 말투구, 함안 마갑총에서 출토된 말갑옷 등을 보면 중무장한 기병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말은 사냥, 운송, 전쟁 등의 수단으로 예부터 사람과 가장 깊은 관계에 있는 동물이었다.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말탄사람모양토기(騎馬人物形土器)

    

*인물 부분

 

*인물 부분

   

*인물 부분

 

*인물 부분

    

*인물의 갑옷

 

*인물 부분

   

*말 머리

 

*말꼬리

 

*말꼬리

 

 

  

<2007.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