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 장례길(7) - 경주 이견대(利見臺)
삼국유사에 인용된 '감은사사중기(感恩寺寺中記)'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처음 창건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어서 동해바다의 해룡이 되었다. 감은사는 아들 신문왕이 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완공하였다. 금당 뜰 아래에 동쪽으로 향해 구멍을 하나 뚫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함이었다.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다.
*이견대
*이견대
682년 5월에는 왕이 이곳에서 해룡으로 화한 문무왕으로 부터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이견대란 명칭은 중국의 고전인 주역에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大人)'이라는 글귀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축성연대는 감은사와 문무왕릉이 완공되는 시기이며, 동해안에 인공으로 마련하여 이와 같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견대
*이견대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에 정부에서 대지(臺址)에 남아있던 초석들을 근거로 하여 새로이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견대의 초석이 원래는 대왕암을 바라보지 않았으며 초석을 돌려서 대왕암을 향하도록 한 후에 건립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따라서 이곳은 이견대가 아니며 현재 이견대의 뒷산 중턱의 건물터가 이견대라는 설도 있다. 당시 신라오악조사단원으로 참여했던 황수영 박사도 후일 현재 이견대 뒤 산 중턱에 신라기와편이 많이 나오는 곳이 이견대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이견대의 위치 확인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가 어느 신문에 연재한 ‘불적일화’라는 회고담을 통해 털어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67년의 시굴 직후 나는 일단 이견정의 위치를 발굴지로 비정하기는 하였으나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보이는 ‘축성(築成)’의 자취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개운치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95년 가을 예전에 최남주 선생이 말하던 산 위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곳은 대본초등학교 뒷산으로, 현재의 이견정에서 국도를 건너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나는 그의 인도로 산 위에 올라가 보았는데, 과연 1천300∼1천600여㎡(약 400∼500평)의 너른 대지가 있고 그 삼면에 인공으로 축석된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근에 신라시대 와편이 보였고, 또한 커다란 민묘와 석비 1기가 있었다. 석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비문 가운데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이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는 “현재의 이견대 자리는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였다.
*이견정 편액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한편 1970년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 경주부 이견대조의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조의 기록에서 이견대와 대왕암의 거리가 상이할 뿐 아니라 양자간의 거리가 너무나 짧은 탓에 둘 중 하나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확인된 자료인 고려말 또는 조선초의 '도은문집(陶隱文集) 초옥자전(草屋子傳)'에 의하면 고려 말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인 이숭인(李崇仁)이 계림 출신의 초옥자와 함께 감은사를 방문하고난 후에 이견대에 올랐으며, 또한 배를 타고 대왕암에 이르렀다고 하여 (......登利見臺舟至大王岩) 대왕암이 바다 가운데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 이견대에 올랐다 함은 이견대가 높은 곳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여 이견대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참고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장으로 활동한 의병장 이눌(1569년출생-1599년사망)이 남긴 ‘낙의제선생유집’을 읽어보면 "1593년(계사년) 음력 4월 11일에 우리의 의병들이 이견대 밑으로 진군했다(癸巳四月十一日 進軍于利見臺)"는 내용이 나온다. ‘이견대밑(利見臺下)으로 진군하다’는 것은 현재의 이견대 자리는 도저히 맞지가 않고 산중턱이나 정상부근이라야 한다.
*동해구비
*대왕암비
의병장 이눌이 이견대에 머물면서 남긴 ‘이견대에서의 두수(利見臺二首)’란 한시를 해석해보면 “창을 베고 누웠으나 밤잠은 아니오고/ 검붉은 피흘러 검포자락 적시네/ 온 나라가 전쟁이라 쉴 날이 없어/ 비바람 치는 산중에 앉아 한해를 보내려니/ 병사들의 보국서사가 참으로 애석쿠나/ 숙질의 위기 임박 또 뉘와 애련해 할고/ 일편병서의 신술을 살펴보며/ 이견대 새벽공기에 또 하늘에 빌었다오/ 오랜 전쟁에 대궐 소식 격조쿠나/ 하늘 밖에 아득하고 마음도 단단하여/ 한곡조 채금가 부르며 날마다 수심이라/ 하늘 끝 저 어느곳엔 오색구름 짙겠네”라는 내용인데, ‘비바람 치는 산중에 앉아(山中坐) 한해를 보내려니’ ‘이견대 새벽공기(利見凊晨)’라는 구절을 잘 음미해보면 왜군을 물리친 의병들이 산 중턱에 있는 이견대에서 머물렀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왕유언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비
만약에 지금의 이견대라면 ‘산중(山中)’이 아니라 ‘산아래(山下)’라든가 아니면 ‘바닷가(海邊)’라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임란 의병장 이눌의 유집에 의해 최소한 400여년 전에는 이견대와 이견정자가 산 중턱이나 산정상 부근에 존재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2007.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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