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 장례길(6) - 경주 감은사터
왕이 평상시에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원컨데 나라를 수호하는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떠받들고 국가를 보위하리라"하니 법사가 말하기를 "짐승으로 태어나서(畜報) 용이 되어도 좋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세상 영화를 싫어한 지가 오래 되었다. 만약에 내가 나쁘게 태어나 짐승으로 된다면 나의 소망에 꼭 맞을 것이다" 하였다.
<삼국유사 문호왕 법민(文虎王法敏)조>
이렇게 문무왕은 대왕암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신문왕의 권력 기반은 취약하였다. 문무왕의 장례 기간 중에 김흠돌의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고 9족을 멸하였다. 이에 신문왕은 뭔가 왕권의 안정을 찾을 비상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신문왕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자.
*감은사터
*금당터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이다. 개요(開耀) 언년 신사(681) 7월 7일에 즉위하여 영명한 선대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이듬해 임오년(682) 5월 초하룻날 바다 일을 보는 파진찬(波珍 ) 박숙청(朴夙淸)이 왕께 아뢰기를, "동해 가운데 한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하여 떠와서 파도가 노는 대로 왔다갔다하나이다" 하였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천문을 맡은 관리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을 쳐보라고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선대 임금이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또 김유신공은 33천의 한 분으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사온바 두 분 성인은 덕행이 같으신 지라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리시려는 것 같사오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보신다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無價大寶)을 얻을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금당터 지하유구
*금당터 용혈
왕이 기뻐하여 그 달 이렛날 이견대(利見臺)로 거동하여 그 산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잘 알아보게 하였더니 산 모양은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막대기 한 개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와서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감은사에 와서 묵는데 이튿날 오시(午時)에 갈라졌던 대tk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이레 동안 캄캄하다가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정 옥대(黑玉帶)를 가져와 바치는지라 왕이 영접하여 함께 앉아서 묻기를, "이 산과 대가 어떤 때는 갈라지고 어떤 때는 맞붙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용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는 쳐도 소리가 없으나 두 손뼉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라는 물건도 마주 합한 연후에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갸륵한 임금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왕이 이 대를 가져다가 젓대를 만들어 부시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선대 임금께서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시고 유신공도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의 마음이 합하매 이와 같이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 나를 시켜서 바치는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삼층석탑
*삼층석탑
왕이 놀랍고도 기뻐서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시주를 하였다. 칙사가 대를 꺾어 바다에서 나올 때에는 산과 용이 갑자기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는 기림사(祈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참을 치렀다.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소문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치하하면서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에 달린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가 진짜 용들입니다" 하니 왕이 물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옥 장식 한 개를 따서 물에 담가 보여드리지요" 하고는 곧 왼쪽에서 둘째 옥 장식을 따서 개울물에 담그니 즉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되었으니 이 때문에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이름지었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를 가지고 젓대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방(天尊庫)에 간직하였는데 이 젓대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가 개고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잦아졌으므로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여 국보로 일컬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조>
*용연 선착장
감은사는 원래 문무왕이 창건하고 그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다. 진국사란 진호국가(鎭護國家)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무왕이 완공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니 아들 신문왕이 완공하여 부황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의 감은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는 불교가 공인된 지 150여년이 지났건망 아직도 왕의 주변에는 해관(海官), 일관(日官), 천관(天官) 등 샤먼이 있어 보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띠는 왕의 상징이었다. 즉 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물건이다. 진평왕은 진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하여 그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은 하늘로 천사옥대를 부여받는 것으로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다. 신문왕도 마찬가지다. 문무왕의 장자이니 정통성 자체에는 문제가 없겠으나 무열왕이나 문무왕 처럼 카리스마를 가지지는 못했던 신문왕이었으니 문무왕과 김유신장군으로부터 옥띠를 받는 것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신문왕이 옥띠를 받기 위하여 대왕암으로 행차했을 때는 음력 5월 16일 이었으니 장마철이다. 당연히 1주일 동안 비가 오고 천둥이 쳤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직전의 혼돈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2007.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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