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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삼릉(三陵)

蔥叟 2006. 12. 12. 08:23

경주 남산 삼릉(三陵)

 

   평양에는 단군릉이 있고 동명왕릉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단군이나 동명왕 당시에는 그러한 거대한 봉분을 가진 왕릉을 만들지 않았다. 만주의 집안에 있는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태왕릉은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한의 안악3호분은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릉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결론은 나지 않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왕릉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왕릉에 대한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왕족의 성씨는 해씨(該氏) 또는 고씨(高氏)이다. 그러나 해씨 성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왕조가 망하면 왕릉도 잃게 되고 성씨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의 경우는 어떨까? 백제의 왕릉으로는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 그리고 무왕의 능으로 알려진 익산의 쌍릉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왕릉은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 뿐이다. 그것고 발굴을 통하여 나온 지석(志石)에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명문이 발견됨으로서 그 주인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삼릉

 

   논산의 계백묘나 견훤묘 등은 극히 최근인 1990년대에 그 이름이 붙여진 묘들로서 전혀 근거가 없고 허황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또한 백제의 성씨인 부여씨(夫餘氏), 해씨(該氏), 목씨(木氏)등은 멸망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에는 현재 남아있지 않는 성씨들이다.

 

   가야 역시 금관가야에 10명의 왕이 있었으나 김수로왕 당시에는 현재의 납릉(納陵 김수로왕릉)과 같은 거대한 봉분을 가진 능을 만들지 않던 시대이며 산청의 구형왕릉도 왕릉이라기 보다는 탑에 가까운 조형물이다. 이같은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현재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왕릉으로 분명한 것은 무령왕릉과 2~3기 정도 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라왕릉은 35~6기 정도가 현재 전칭왕릉(傳稱王陵)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왕릉은 7~8기 정도로 보인다. 그러면 신라왕릉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것은 당시와 가장 가까운 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쫓아 찾아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양 사서에는 23대 법흥왕 이전의 왕릉으로는 박혁거세의 오릉과 석탈해왕릉 그리고 미추왕릉에 대한 기록만 전해진다. 즉 신라왕성인 박, 석, 김씨의 시조왕릉에 대한 기록만 이 전해질 뿐이며, 법흥왕 이후부터 왕릉관련 기록들이 정식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시조왕릉에 대한 것은 소급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아니라 법흥왕 이후에도 쿠테타로 실각한 왕릉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든다.

 

   신라가 멸망한 이후 신라왕릉은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다. 500여년이 지나서 고려사에 드디어 경주지역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려사에도 오릉과 김유신묘에 대한 기록만이 전한다. 세종대에 이르러 경상도지리지, 경상동속찬지리지,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 등이 편찬되엇다. 이때 기본자료가 경주에서 만들어져서 한양으로 올려진다. 이때는 10기의 왕릉에 대한 기록만이 등장한다. 10기의 왕릉은 주로 민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들이다.

 

*삼릉

 

   이는 세종 당시에 이미 56명의 신라왕 가운데 10기만이 전해질 뿐 나머지 46기의 왕릉은 잊혀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박씨, 석씨, 김씨들이 왕릉을 전혀 관리하지 않았으며 꾸준히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성종 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세종 대와 같이 10기의 왕릉기록만이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1669년에 경주부윤 민주면이 편찬한 동경잡기에도 10기의 왕릉만이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에는 족보가 없었고 가첩(家諜)만을 만들었다. 가첩에는 본인과 처가의 8대조까지만 기록하였다. 가첩에 의하여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여 음서직(蔭敍職)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수많은 양반들이 죽고 가족이 흩어졌으며 급기야는 권력집단까지도 교체되었다. 세조 대의 계유정란을 통하여 집권한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훈구파는 족보를 만들어 과거의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유지하려 하였고, 사림파 역시 족보를 통하여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찾으려 하였다.

 

   경주박씨 문중은 1684년에 족보를 간행했다. 경주김씨 문중도 1년 뒤인 1685년에 족보를 편찬하였다. 이때부터 8대조만을 기록하던 가첩과 달리 시조로부터 누대를 모두 기록하는 오늘날의 족보를 만들었다. 족보와 함께 선조의 행적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더불어서 조상의 능묘를 찾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조선전기까지 시조에 대한 의미가 별로 없었다. 당시에는 모계와 부계가 동등하였으며 어려서는 외가에서 자라다가 장가를 들고나면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으며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가 낙향하게 되면 처가나 외가로 낙향하였다. 그러므로 본가는 의미가 없었다. 포은 정몽주의 유적이 영천에 있는 것도 외가가 영천 임고였기 때문이며, 회재 이언적의 유적이 경주 양동에 있는 것도 바로 양동이 외가였기 때문이다. 

 

*삼릉

 

   조선후기가 되면서 재산분배방식에도 큰 변화가 온다. 조선전기까지 재산분배의 대원칙은 자손균분(子孫均分)이었다. 이때 딸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제사는 윤회봉사(輪回奉祀)였고, 외손봉사(外孫奉祀)도 가능하였다. 처첩에 대한 구분도 없었으며 맏아들에 대한 특권도 물론 없었다. 따라서 자식들을 족보에 올리 때에도 적서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적서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장본인은 태종 이방원이엇다. 그는 화장을 금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를 것을 명하였다. 이는 바로 중국화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종의 명은 잘 이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점차 그의 명은 먹혀들기 시작하였다. 주자가례에 따라 장자상속(長子相續)이 시행되었다. 즉 재산은 맏아들에게 모두 상속되었고 제사도 역시 맏아들이 봉사하게 되었다. 맏아들 이외의 나머지 자식들은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 맏아들이 거주하는 마을에서 생활을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동성동본 금혼제도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처음에는 마을 안에서만 이루어지던 동성동본금혼이 차츰 이웃 마을로 급기야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딸은 재산권과 제사권에서 멀어져 갔고 아들을 낳아야만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칠거지악이니 양자제도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마을 단위로 문중이 생기고 부계중심의 족보를 만들고 모든 대소사가 맏아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시조, 중시조, 입향조를 중시하게 되었고 조상의 무덤을 찾아 증거를 제시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곧 족보는 국가가 인정하는 공문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릉

 

   그런데 이때 만들어진 족보에는 대부분의 시조를 신라 경순왕이나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시켜 찾게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성씨들이 시조로 부터 33대손 부근에 이르러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고려 개국공신 중의 한 사람을 자신들의 시조로 만들었던 것이다.

 

   능묘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까이는 700여년 전, 멀리는 1700여년 전의 무덤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1730년 경주박씨와 경주김씨가가 모여 무덤 찾는 일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마을에서 형님의 집은 높은 곳에, 아우의 것은 낮은 곳에 지었고 무덤도 윗대는 높은 곳에 아랫대는 낮은 곳에 터를 잡았고 이는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을 신라시대의 왕릉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박씨의 왕릉으로 전해지는 오릉을 기준으로 오릉 아래 남산 서북쪽 무덤들은 경주박씨의 왕릉으로 나머지 무덤들은 경주김씨의 왕릉으로 지정해버렸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칭되고 있는 것이다. 

 

   경주지방의 무덤들은 건국초기인 기원전후 시기부터 4세기 중엽까지 400여년간은 토광목관묘와 토광목곽묘를 만들던 시기였다. 이때 만든 무덤은 오늘날 경주시내 분지에 남아있는 거대한 봉분을 가진 적석목곽분이 아니라 작은 봉분이엇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봉문은 없어졌다. 1730년에 경주박씨들은 6기의 왕릉을 지정하였고 경주김씨들은 11기의 왕릉을 새로이 지정하였다. 당시 경주에 살았던 화계 유의건은 '화계집 나릉진안설(羅陵眞贋說)' 에서 잘못된 왕릉 지정에 대한 우려를 잘 말해주고 있다.

 

   "대체로 천년 후에 이르러서 천년 이전의 일에 대한 자취를 살피건데 문자의 기록에 의하지 않고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비록 신라 사람으로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해도 상세하게 알지 못할 것이다. 누구의 왕릉이 어느 곳에 있다함이, 하물며 당시의 무지한 촌 사람의 말한 바에 따름이랴. ...중략...

  

   이것에 대하여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관가는 참봉들의 말한 바에 의하여 모두 왕릉으로 정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관가에서는 역시 가능하지 않았다. 모든 참봉들에게 청하였으나 왕릉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왕릉은 능지기들의 알린 바에 의하였다'고 하였다. 오호라! 능지기들은 한자도 모르는 무식한 촌사람들이다."

 

 

<화계집 나릉진안설(花溪輯 羅陵眞贋說)>

 

*삼릉

 

   삼릉은 위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 제53대 신덕왕릉(神德王陵), 제54대 경명왕릉(景明王陵)으로 전하고 있는데 1730년에 지정되었다. 삼국사기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조에 의하면 "아달라왕은 아들이 없어 나라사람들이 벌휴를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덕왕조에 의하면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원손(遠孫)이다." 라고 하여 서로 상반되게 기록하였다. 또한 8대왕과 53대왕이 700여년의 시간적 차이를 두고 같은 공간에 나란히 왕릉을 조영하였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아달라왕릉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덕왕릉에 대하여서는 삼국유사에 "화장하여 뼈를 잠현(簪峴) 남쪽에 장골(藏骨)하였다" 고 했으며,  삼국사기에는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였다. 경명왕릉은삼국유사에 "화장하여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했다 " 고 한다.

 

   따라서 신덕왕과 경명왕이 박씨인 아달라왕의 후손이라는 것도 믿기가 어려우며 신덕왕릉과 경명왕릉이 아달라왕릉과 같은 장소에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전신덕왕릉은 일제시대에 도굴된 적이 있었고 1963년에도 도굴된 적이 있었다. 두굴 후에 발굴 한 결과 무덤 양식은 6세기 이후부터 경주지방에 등장하는 횡혈식석실분이었다. 이 무덤의 구조적 특징으로 보아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의 구조를 보면 할성(割石)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장방형에 가깝고 남벽중앙에 이중의 긴 연도가 달렸고 천정이 재래식 굴둑처럼 높이 올라간 형식이다. 현실내에는 연도와 직각으로 넓고 높은 관대(棺臺)를 만들고 그 위에 긴 판석 2매를 놓아 시상(屍床)을 두었다. 북벽과 인접한 동, 서벽에 연도의 천정 높이만큼 장방형 구획을 만들고 상하로 나누어 백(白), 황(黃)>, 주(朱), 청(靑)의 색을 칠하여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효과를 내었다.

 

 

 

<2006.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