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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희궁 흥화문

蔥叟 2018. 11. 14. 04:57

서울 경희궁 흥화문

 

광해군 대에 지어진 경덕궁은 규모가 있는 완비된 궁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조 대 이후 경희궁은 이궁으로 쓰이면서 점차 궁궐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를 갖춰나갔다. 한창 때 경희궁에는 이름 있는 전각만 해도 120채가 넘었다. 하지만 경희궁은 아무래도 궁궐로서 미흡한 면이 많았다. 우선 그 자리가 반듯하기 못하였다. 크게 보자면 인왕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지만, 산을 바로 등지고 있지 않다. 인왕산에서 내려온 산자락은 겨의 평지가 되다시피 한 상태로 북에서 남으로 경희궁의 서족을 지나 흘러내려 간다. 동쪽에는 구릉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낮은 맥이 겨우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 맥은 오늘날엔 주택이나 아파트, 음식점 사이에 묻혀버렸다. 그러다 보니 물길도 시원치 않다. 물길을 이룰 만한 배후지가 없다. 후원을 이룰 만한 산기슭도 없다. 배산임수의 조건이 온전치 못한 것이다. 궁궐로서는 면적도 좁다. 하지만 경희궁도 외전, 내전, 동궁, 궐내각사, 생활기거공간, 후원의 여섯 공간은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궁궐로서의 게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다만, 외전, 내전 등의 배치는 다른 궁궐들과는 다르게 되어있었다. 반듯하지 못한 지형, 좁은 면적에 배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한계였다.

   

경희궁도 궁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궁성에는 밖으로 통하는 문이 동쪽에 줄, 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모두 다섯 개가 있었다. 그 가운데 정문은 동향을 하고 운종가를 맞이하는 흥화문이었다. 흥화문 북쪽에는 흥원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 남쪽에 개양문이 있었다. 경희궁의 전각들이 거의 모두 남향을 하고 있으므로 정문도 남향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만, 경희궁 주위의 지세와 도로가 그렇지 못하므로 정문을 궁성의 동남쪽에 배치하면서 동쪽으로 바라보게 한 것이다. 흥화문은 임금과 외국 사신, 소수의 관원들이 드나드는 의전적인 문이었다. 궁성의 남쪽, 흥화문에서 돈의문으로 이어지는 길에 면한 개양문으로는 관원들을 비롯한 많은 인원이 드나들었다. 개양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승정원, 오른편에 빈청 등 궐내각사가 있었다. 하지만 흥화문을 제외한 문들은 모두 사라져 오늘날은 그 자리를 가늠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이다. 흥화문은 동향을 하고 운종가를 정면으로 맞이하였다. 운종가는 도성의 동대문인 흥인문에서부터 서족으로 곧바로 이어져, 흥화문을 향해 뻗어 있었다. 정면에서 보면 그렇게 길이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을 터이나, 운종가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흥화문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경희궁의 남쪽 궁성을 따라 조금 더 가서 도성의 서쪽 문인 돈의문으로 나갔다. 이렇게 꺾이는 것이 어색했겠으나 운종가가 도성의 흥인문에서 돈의문으로 이어져야 했으니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운종가를 굽게 하면서까지 운종가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자리를 고수하는 까닭은 흥화문이 운종가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궁궐 정문의 주인 임금은 궁궐만의 주인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 온 나라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세삼 보여준다.

 

지금 본래 흥화문이 있었던 자리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서족으로 가다가 서울역사박물관 못 미쳐 살짝 서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렇게 꺾어지기 직전 북쪽으로 새문안로3길이 갈라져 나간다. 그 도로를 따라가면 낮은 고개가 있다. 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옛날에는 이 고개를 야주개라고 하였다. 경희궁의 궁성은 야주개를 넘어 남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내려오던 경희궁의 궁성이 옛 운종가를 만나는 지점에 흥화문이 있었다.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다. 다만 지금은 새문안로가 남쪽으로 확장되어 옛 운종가보다 훨씬 넓어졌다. 옛 흥화문 자리를 가리키는 표석이 구세군회관 앞 인도 한켠을 지키고 있지만 별반 눈길을 끌지 못한다.

흥화문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졌던 궁성은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바깥을 따라 났던 길이 더욱 넓어져 8차선 대로가 되었다. 그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옛 문이 하나 남향으로 서 있다. 오늘날의 흥화문이다. 경희궁의 전각들이 이리저리 헐려나갈 때 흥화문도 그 수난을 면치 못하여 남아 있던 건물들 가운데서도 가장 자주 옮겨 다니며 고초를 겪었다경성정학교의 정문이 되었다가 춘무산의 박문사 정문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박문사터에 해방후 영빈관이 들어서고 다시 신라호텔로 바뀌는 동안 흥화문은 그 정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경희궁터로 돌아왔다. 하지만 원래 정문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회관이 들어서 있어 하는 수 없이 빈터, 현재의 위치에 남향으로 자리잡았다.


▲경희궁 흥화문

▲경희궁 흥화문

 

 

 

<2018.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