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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장창골 출토 삼존불좌상

蔥叟 2018. 9. 30. 14:23

경주 장창골 출토 삼존불좌상

 

1924년 경주 남산 장창골의 한 설식에서 발견되어, 그 이듬해 박물관으로 옮겨온 불상이다. 삼화령 미륵삼존불이라고도 부르는데,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조'조에서 선덕여왕 3년, 즉 634년에 경주 남산 삼화령 생의사라는 절에 있던 미륵삼존불이라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입가에 머금은 천진난만한 미소 때문에 '애기부처'로도 불린다. 이 불상은 애기같은 얼굴과 신체, 통통하면서 탄력적인 얼굴 등에서 중국의 북제 및 수대 조각양식을 반영하고 있지만, 화강암의 견고한 석질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하게 표현된 상의 조형성은 신라 특유의 양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적인 특징은 경주 배리 삼존석불의 그것과 직결된다.

 

선덕여왕 때에 중 생의(生義)가 일찍이 도중사(道中寺)에 살았는데 꿈에 웬 중이 와서 그를 끌고 남산으로 올라가 풀을 매어 표를 하게 하고 산 남쪽 골에 와서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묻혔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고개 위에 안장해주소”라고 하였다. 그는 꿈을 깨어 친구들과 함께 꿈에 표시해 둔 자리를 찾아 그 골에 와서 땅을 팠더니 웬 돌미륵이 나오므로 이를 삼화령(三花嶺) 고개 위에 두었다. 선덕여왕 12년 갑진(644년)에 절을 짓고 살았으니 뒤에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생의사 석미륵(生義寺石彌勒)조>

 

장창골 출토 석미륵삼존불상이 만들어져서 생의사까지 옮겨지는 과정을 설화로 엮은 이야기이다. 현재 본존불이 발견된 곳에는 3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1개의 돌기둥은 넘어져 있다. 양 협시보살은 남간 마을에서 발견되었으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에서 본존불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돌기둥의 모습을 보면 삼존불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협소하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미륵은 현재는 도솔천이라는 하늘나라에서 보살로 있지만 미래에는 석가여래의 뒤를 이어 부처가 되기로 이미 정해져 있는 보살이기 때문에 보살상으로도, 여래상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여래상일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가부좌한 불상과는 달리 이 장창골 석불처럼 의자에 앉은 자세(椅子坐)가 원칙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을 한 여래입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구별이 쉽지 않다. 이 불상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생의사의 돌미륵불로 추정하여 흔히 삼화령미륵삼존불이라고도 하며, 조성시기는 고신라 말기인 7세기 중엽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처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같은 얼굴의 표현이나 4등신의 신체표현을 한 불상은 주로 7세기 전반에 조성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같은 추정이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의좌상의 미륵불을 찾아볼 수 없지만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미륵불이 의자에 앉아있는 예가 많아서 이 삼존불을 미륵삼존불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불상의 특징은 특이하게도 의자에 앉아있는 이른바 의좌상(依坐像)으로써 독립된 불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불상이다. 또한 협시보살은 조각기법이 마치 아랍인들의 터번을 두른 듯한 독특한 조각을 하고 있다. 얼굴의 미소는 삼국시대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쨌든 현재로서의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선덕여왕 때인 640~650년경의 불상으로 분류해둔 상태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과연 이와 같은 불상을 만들 수 있었을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으며 혹은 백제인들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삼존불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안민가와 찬기파랑가와 같은 향가를 지은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인 충담스님이 이 미륵불께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우려 공양하였다고 한다.

 

경덕왕이 3월 삼짇날 귀정문(歸正門) 문루 위에 나와 앉아 측근자들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에 나가 훌륭하게 차린 중 한 명을 데려올 수 없을까?”하였다. 이때 마침 풍채가 깨끗하게 생긴 중 한 명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을 측근자들이 바라보고 그를 데려와 현신 시켰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훌륭하게 차린 중이란 저런 중이 아니다” 하고는 그를 물리쳤다.

 

또 다시 웬 중 한 명이 누비옷에 벚나무로 만든 통을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서 문루 위로 맞아들였다. 왕이 그 통 속을 들여다보니 차 달이는 도구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너는 대관절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중이 대답하기를 “충담이올시다” 라고 하였다. 왕은 또 묻기를 “어디서 오는 길인가?” 하니 중은 “소승이 3월 삼짇날(重三)과 9월9일(重九)이면 남산 삼화령에 있는 미륵세존님께 차를 달여 올립니다. 지금도 차를 올리고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도 차 한잔을 얻어먹을 연분이 있는가?” 하였더니 중은 곧 차를 달여 바치는데 맛이 희한하고 찻종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코를 찌를 듯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기는 대사의 기파랑을 찬미하는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하니 그는 대답하여 “그렇소이다” 하였다.

 

왕이 “그러면 나를 위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도록 다스리는 노래를 지으라” 하니 중이 당장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칭찬하고 그를 왕사로 봉하니 중은 공손히 절을 하면서 굳이 사양하여 이 직책을 받지 않았다. 이 노래가 바로 안민가(安民歌)이다.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

 

둘째는 윤경렬을 비롯한 주민들의 견해로 삼화(三花)는 세 곳을 의미하기 때문에 남산에서 가작 높은 세 곳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여 금오산, 고위산 그리고 언양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석미륵삼존불은 언양재의 연화대좌에 있었으며 이곳이 삼화령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언양재의 연화대좌는 양식상으로 700~800년대의 것이며 또한 남산에서 절이 세워지는 것이 7세기에는 남산 기슭에, 8세기에는 중턱에 그리고 9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정상 부근에까지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불상은 선덕여왕대인 7세기 전반기의 불상이므로 언양재에는 절이 세워지기 전에 만들어졌으므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만일 이 불상이 있던 장소가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면 선덕여왕 시대의 불상이 아닌 것이 되고 그렇게되면 불상의 연대를 다시 편년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불상은 정치,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당시 서라벌을 지키던 왕궁수비대가 자리잡았던 남산성 부근에 화랑과 관련된 미륵불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현재 삼화령이 어디인가에 대한 견해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첫째는 세 명의 화랑이 넘던 고개라는 설이다. 삼화(三花)란 삼일포(三日浦)와 삼랑사(三郞寺) 등과 관련하여 세 명의 화랑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설화가 삼국유사 에 전한다.

효종화랑(孝宗花郞)이 남산의 삼화술(三花述)에 나가 노는데, 문하의 식객들이 그곳으로 빨리들 모였으나 유독 두 사람이 뒤늦게 왔다.……(이하생략)

 

<삼국유사 빈녀양모(貧女養母)조>

 

삼화술에서 술(述)은 수리요 수리는 꼭대기 곧 정상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고갯마루라는 뜻이기 때문에 삼화령과 같은 뜻이 된다. 이곳은 화랑들이 넘나들던 곳이며 또한 이곳은 남산성터이기 때문에 화랑들이 넘나들던 곳임에 틀림없다.

 

▲삼존불좌상

 

▲삼존불좌상

 

▲삼존불좌상

 

▲삼존불좌상

 

▲본존불의좌상

 

▲본존불의좌상

 

▲본존불의좌상

 

▲본존불의좌상

 

▲본존불의좌상

 

▲본존불의좌상

 

▲본존불의좌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좌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우협시보살상

 

 

 

<2018.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