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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론나루와 왕궁터 - 왕궁터

蔥叟 2018. 9. 17. 02:27

폴론나루와 왕궁터 - 왕궁터

 

Polonnaruwa Royal Palace - Citadel

 

폴론나루와는 10~12세기에 싱할라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전성기에는 타이나 미얀마에서 승려가 찾아올 만큼 불교 도시로서 번영 했다. 그 영화를 전해주는 유명한 대유적군이 지금은 소도시가 되어 버린 이곳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유적이 남아 있는 구시가는 거대한 인공 저수지 부근에 있다. 파라쿠라마 사무드라라고 불리는 이 저수지는 단순히 저수지라 부르기엔 엄청나게 크고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담고 있다. 일찍이 이 땅을 지배해 왔던 역대의 왕들은 도시를 건설 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관개용 저수지와 수로의 정비였다고 한다. 농사로 먹고 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물의 확보는 일상생활과 밀착된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파라쿠라마 사무드라도 그렇다. 폴론나루와의 번영은 드라이 존이라 불리는 이 메마른 대지에 생명의 물을 준 파라쿠라마 사무드라 덕분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는 아누라다푸라에서 1,400년간 풍요를 누린다. 물론 타밀과의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9세기에 와서는 이웃 인도 타밀에 ‘촐라’라는 강력한 좡조가 들어서면서 힌두세력의 침입이 잦았다. 11세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 수도를 지킬 수 없게 되자 싱할라 왕조는 동쪽으로 80km 떨어진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즉 싱할라 왕조의 두 번째 수도가 폴론나루와로 결정되면서 이때부터 180년간을 싱할라의 폴론나루와 시대라 부른다.

 

1,500년 이상을 지켜온 싱할라의 문화적 자존심은 이곳 폴론나루와로 옮겨와서 더욱 문화를 꽃 피워 화려한 중세 불교문화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시대적으로 불교 본토인 인도에서는 불교학의 요람으로 불리던 날란다 불교대학이 이슬람교도에 의해 11세기 무참히 부서지고, 그곳을 지키던 승려들은 제각기 흩어져 일부는 티벳으로, 일부는 미얀마로, 그리고 상당수는 이곳 스리랑카 폴론나루와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로 이들이 오면서 폴론나루와는 중세 최고 최대의 불교 중심지가 되었다. 이렇게 폴론나루와가 불교의 최대 중심지가 되자 태국과 미얀마와 같은 인접국은 물론이고 멀리 한국과 중국, 티벳에서까지 많은 학승들이 유학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렇게 번영하던 폴론나루와도 더욱 강력해진 힌두 타밀세력의 침입으로 종말을 고하고 13세기 중반 야파후와1220~를 거쳐 14세기 중반1345~ 감포라, 15세기1412~ 코테 시절을 거쳐 16세기 후반1500~1739 캔디에서 마지막을 꽃피우고 2,358년을 싱할라 왕조는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0세기 아누라다푸라에서 남동쪽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긴 싱할라 왕조는 ‘파라쿠라마 바후 1세’1153~86 때 이곳에 거대한 왕궁을 건설하였다. 왕궁 본 건물은 당시에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지었고, 주변에 부속건물을 배치하였다. 또한 왕궁 바로 옆에 왕권의 상징인 불치를 모시는 사원을 건립하여 왕의 권력과 종교의 신성함을 동일 공간에 배치하여 더욱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화려했던 왕궁은 현재 대부분 터만 남아있고, 왕의 접견실과 목욕시설만이 그나마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왕궁의 모습을 스리랑카의 역사서 마하밤사Mahavamsa에 의하면 본관만 가로 31m, 세로 12m의 규모로 당시 기술로는 획기적인 7층에 30m 높이로 조성된 왕궁이었다. 총 공사기간이 7년 7개월이 걸린 이 왕궁은 30개의 튼튼한 벽과 기둥으로 만들어져 모두 1,000개의 방과 두 개의 거대한 홀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55실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왕궁은 3층까지는 벽돌로 지어졌고, 나머지 4개 층과 지붕은 나무로 지어졌다. 현재의 모습은 층간 서까래Rafter를 끼웠던 구멍이 나있는 벽돌 벽과 기초의 흔적만 남아있다. 이토록 장엄했던 왕궁은 13세기 초 스리랑카를 침입했던 남인도 판디아 왕조의 마가Maga, 1215~1236에 의해 파괴되고 불태워졌는데 현재도 일부 벽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다.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왕궁터

 

 

 

<2018.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