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아대륙문화순례◈/스리랑카문화권

정글 속의 바위성 - SIGIRIYA ROCK

蔥叟 2018. 7. 31. 11:55

정글 속의 바위성 - SIGIRIYA ROCK

 

시기리아 바위산은 정글 속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주위의 숲과 상당히 대조적인 적갈색 바위산은 하늘을 향해 거의 수직으로 솟아 있다. 그 경관을 보고 있으면 지구의 에너지가 이렇게 기막힌 것을 만들어 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기리야 여행은 이런 놀라움과 더불어 시작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바위산 꼭대기에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던 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억지로 왕좌에 오른 젊은 왕자는 동생의 복수가 두려워 이 성을 쌓았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경사가 급한 바위를 거의 기다시피 하며 산꼭대기에 올라서 지금은 유적밖에 남아 있지 않은 왕궁에 서면 들려오는 바람 소리 뿐이다.

 

영국의 통치하에 있던 1875년에 우연히 이 바위산을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던 영국인에 의해 처음 발견된 ‘시기리야 레이디’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예술로서 지금은 전 세계에 알려진 벽화이다. 1,400년이란 세월의 잠에서 깨어난 18명의 미녀들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스리랑카 유적을 찾는 여행에서 이 바위산은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이 왕도로 사용된 것은 11년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스리랑카를 찾는 수많은 외국 관광객에게 ‘무엇을 보려고 스리랑카에 오셨나요?’ 하고 물으면 90%이상이 ‘시기리아를 보기 위해서 왔지요’ 라고 대답한다. 시기리아는 그 만큼 경이롭고 신비로운 곳이라서 세계 10대 혹은 8대 불가사의에 단골로 선정되곤 한다. 시기리아는 ‘사자의 언덕’ 혹은 ‘사자의 목구멍’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먼저 ‘사자의 언덕’은 인도어에서 전래된 말로 ‘싱하Sinha’는 사자, ‘기리아Giria’ 언덕의 합성이 이다. ‘사자의 목구멍’은 스리랑카 싱할리어에서 유래된 말로 사자를 뜻하는 ‘싱하’와 목구멍을 뜻하는 ‘기리’의 합성어이다. 고대부터 불교 승려들의 수련장이였던 시기리야 록에는 5세기 후반에 11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이곳을 다스리며 장대한 바위산의 걸작을 남긴 광기의 왕 카샤파의 전설이 스리랑카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기 5세기(436년) 스리랑카는 다시 타밀족의 침략으로 수도 아누라다푸라가 함락되고 만다. 이후 무려 27년간이나 타밀의 지배를 받으며, 싱할라 왕조는 붕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혼란기에 ‘다투세나Dhatusena, 463~479’라는 위인이 나타나 타밀세력을 밀어내고 아누라다푸라를 수복시킨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여 싱할라 왕조를 계승하였는데, 그에겐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부인은 왕이 되기 전에 얻은 부인으로 그저 평범한 신분의 여인이었고, 다른 부인은 왕이 된 후 결혼한 왕족 출신의 부인이었다. 두 부인 사이에 각기 한 명씩의 아들이 있었는데 평범한 부인으로 부터는 ‘카샤파Kasyapa, 재위 479~497’왕자를 얻었고, 왕족 부인으로부터는 ‘목갈라나Moggallana 재위 497~515’왕자를 얻었다.

 

이복형제로 태어난 이들은 서로 성격이 확연히 달라 형 카샤파는 호전적이며 성격이 급했고, 동생 목갈라나는 논리적이고 차분했다. 세월이 흘러 다투세나 왕이 늙어감에 따라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데 싱할라 전통으로는 당연히 장자인 카샤파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순리지만 다투세나 왕의 마음에는 둘째 목갈라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늘 천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것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고 있던 카샤파 왕자는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급히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그는 먼저 부왕인 아버지를 죽이려고 왕궁을 급습하여 왕을 지키는 호위 군사를 제압한 후 왕을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칼을 들이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왕이시여, 이제 왕위를 제게 물려주시고, 부왕이 갖고 계신 전 재산을 저에게 주시지요.” 그러자 부왕은 “넌 어찌 나의 아들로서 이런 패륜을 저지를 수 있느냐? 왕의 자리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자에게 돌아가는 자리니라. 아울러 내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이 나라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저 저수지뿐이니라” 부왕의 말을 들은 카샤파는 더욱 흥분하여 결국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범한다. 이어 그는 동생 목갈라나를 죽이러 갔지만, 이복동생은 이미 왕궁을 빠져나가 바다를 건너 남인도로 탈출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쿠데타로 옥좌에 오른 카샤파는 이후 심각한 정신 분열증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불안하여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 점차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고자 고민 끝에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 왕궁을 건설하려 마음먹고 부하들을 시켜 이러한 조건을 가진 요새를 찾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던 중 오랜 세월 동안 승려들의 수행장소로 쓰고 있던 바위요새를 찾아내었다.

 

정글 한가운데 377m나 우뚝 솟아있는 이 바위요새는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만약 산 위에 성을 세운다면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하여 483년 축성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수행 중이던 승려들을 모두 쫓아내고 성 밖으로는 악어를 키우는 해자를 만들고, 안으로는 ‘물의 정원’을 조성하였다. 또 바위산 곳곳에 돌 기뢰를 설치하여 외부 침입에 대비한 ‘돌의 정원’과 ‘테라스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스핑크스 같이 생긴 사자 상을 조성하고 그 목구멍으로 사람이 다니는 통로를 만들었다. 예술가이며 정신이상자이기도 했던 카샤파 왕은 바위산 정상에 수영장, 연회장을 갖춘 화려한 궁전을 완성하였다.

 

카샤파가 시기리아로 천도한지 어느 덧 14년이 흐른 497년, 철옹성에서 안전하게 영원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그에게도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인도로 도망간 이복동생 목갈라나는 타밀로부터 원군을 지원받아 형이 다스리는 스리랑카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동생은 장기전에 대비해 시기리아 성으로 오르는 모든 급수를 차단하였다. 물이 고갈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카샤파는 남은 군대를 정비하고 성에서 내려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코끼리를 타고 전투를 벌였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더군다나 카샤파가 타고 있던 코끼리 발목이 바위틈에 끼게 되면서 카샤파는 앞으로 꼬꾸라지며 땅위로 떨어졌다.

 

통제력을 잃은 카샤파의 군대는 후퇴한다. 혼자 남겨진 카샤파는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카샤파는 목갈라나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파란만장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 후 동생 목갈랴냐는 아누라다푸라로 수도를 다시 옮기고 시기리아는 승려들의 수행 장소로 돌려주었다. 그 후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시기리아는 1898년 영국군 장교이자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1,4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시기리아는 현재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1982년)되어 보호되고 있다.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SIGIRIYA ROCK

 

 

<2018.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