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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오봉산 청평사 문수원 정원 영지

蔥叟 2018. 7. 22. 09:57

춘천 오봉산 청평사 문수원 정원 영지

 

청평사의 고려정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이자현이 문수원에 머문 1089-1125년 사이 만들어졌고, 청평사 들목의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정상 바로 아래 식암(息庵)언저리 까지 3km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의 계곡 구석구석으로 이어지는 고려 선찰의 계획된 정원이 펼쳐진다지금은 거의 자연에 묻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얼마 안 되지만 방대한 규모의 문수원 정원은 조사 연구한 바에 따라 동서남북의 네 구획으로 나뉜다. 저 아래 구성폭포 일대의 적석(積石)과 연못 , 인공석실, 정자 터로 꾸며진 서쪽 냇가의 중원(中苑) 복희암과 연못, 동굴 석실, 좌선대(座禪臺) 2기 항상 물이 가득 담긴다는 수만식 돌 정원 주변이 남원(남원), 동쪽의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정자와 소규모의 적석군(積石群)이 동원으로 구성 되었다. 북원은 청평사 왼쪽 계곡을 타고 위쪽으로 올라 지금의 해탈 문을 지나 만나는 가파른 선동과 인공 석산, 오봉산 정상아래 지금 적멸보궁이라 부르는 아스라한 인공 석실과 그 왼편바위에 이자현이 새긴 각자 청평식암, 그 주변의 좌선대와 돌계단등 가히 선경(仙境)을 이루는 이 일대를 말한다.

 

이자현은 웬만한 사람들은 올라와 보지도 못하는 곳 높은 북원에서 주로 선도(仙道)를 닦았다. 이자현은 그렇게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계곡에 수로를 만들고, 물길을 끌어들여 정원 안에 영지를 만들어 오봉산이 비치게 했으며 물레방아를 돌렸다. 오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높고 가파른 계곡을 돌로 쌓고 다듬어 선 도량과 암자의 수도 분위기에 걸맞게 도량 전체를 하나의 자연숲으로 절묘하게 가꾸었던 것이다. 특히 청평사 문수원은 일본 교토에 있는 사이호사 고산수식 정원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는다. 고려시대엔 송나라 산수원림의 영향을 받아 궁원을 비롯해 민간에서도 종종 정원을 꾸몄다고 하나 남아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당대의 권력 귀족층이었던 김치양, 이공승 , 최충원, 최우 등이 화려한 정원을 꾸미고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이자현의 부도 오른쪽에 있는 영지를 1981년 조사단이 지표발굴과 측향 조사했는데, 이 연못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연못인 영지라고 밝혔다. 영지 밑바닥에서 고려 말 청자편과 조선시대 백자편이 발견됐으며, 못의 규모는 남북 19.5m, 북쪽 호수 안이 16m, 남쪽 호수 안이 11.7m로 뒤쪽이 약간 넓은 사다리꼴이다. 이는 감상자의 시각을 배려 한 것으로 추측되며, 연못 속에 큰 돌 셋을 놓아둔 것은 삼산의 봉우리를 상징한다. 또 연못을 영지라 함은 물이 맑고 깨끗하여 아름다운 오봉산 부용봉 이 비치기 때문이다.

 

여기서 400m 떨어진 청평사 계곡 하류에는 정원 조성용 암석과 석축이 발견되었다. 이자현은 청평사를 중건하고 정원을 만들면서 이 영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정원을 꾸몄던 것이다. 누석식 정원을 중심으로 영지와 정자, 청각적 효과를 위한 수구식 정원까지 동원, 평지의 정원과 계곡에 자리한 정원, 산 속의 정원등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원을 마련해 수도하는 선원의 특색에 걸맞도록 꾸몄다. 문수원정원에 관한 이 같은 기록들은 청평사문수원기비에서 밝혀진 것들이다. 문수원 정원으로 이름났던 이곳엔 당시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니 조선시대 학자 우담 정시한은 이곳 선동식암에서 여러 날을 묵으며 청평사의 모습을 감상하고, 진락공 이자현의 유적을 두루 찾아 그 고풍을 추모했다고 그의 저서 산중일기에서 토로하고 있다.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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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