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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물걸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蔥叟 2018. 7. 14. 08:31

홍천 물걸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2호. 높이 172cm. 높고 분명한 육계와 균형잡힌 신체 비례, 안정감 있는 자세에서 통일신라 중대의 조각 양식에 근원을 두었음을 알 수 있지만 전성기 조각에 보이는 탄력 있는 신체의 생동감은 결여되어 있다. 얼굴은 이마보다 두 뺨과 턱이 넓고 둥글게 처리되어 있어 피부가 축 늘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가늘게 올라간 눈과 윤곽이 뚜렷한 입술 위로 어렴풋이 보이는 미소는 경북대학교 소장의 사암제(砂岩製) 불입상에 나타나는 이국적인 면모를 연상시키지만, 어느 정도 토착화가 진전된 한국적인 불안의 한 갈래로 추정된다.

 

당당하면서 건장한 불신을 약간 두터워진 통견의 법의가 감싸고 있어 신체의 굴곡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깨에서부터 지권인(智拳印)을 맺은 뒤 팔 위로 층을 이룬 옷주름이 가지런히 흘러내리고 있다. 무릎 위로 흘러내린 소맷자락은 유연하면서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있어 사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대일여래의 수인(手印)인 지권인은 본래 사바세계를 상징하는 왼손 검지를 부처의 세계인 오른손이 감싸쥔 모습으로 두 세계가 결국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과 같이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가 바뀐 지권인을 취한 것이 가끔 있는데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지권인뿐만 아니라 항마촉지인도 좌우가 바뀌어 왼손으로 촉지인을 취한 상도 종종 있다.

 

이와 같이 수인이 혼동된 예가 적지 않은 것은 도상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진리의 본체로서 변하지도 않고 사멸하지도 않는 법신인 비로자나는 대승불교의 불타관이 발전함에 따라 등장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신앙의 보급과 비로자나상의 조성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8세기 중엽에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이 처음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현존하는 가장 이른 예는 석남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그후 촉지인상과 함께 신라 하대를 대표할 만큼 많이 만들어졌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이루어진 팔각연화좌이며 하대석의 8엽 연화의 꽃잎 끝부분이 살짝 반전된 것은 이 대좌가 신라 하대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모각했고 한 면에는 향로를, 다른 면에는 모두 주악상(奏樂像)과 공양상(供養像)을 새겨넣었다. 단판의 앙련(仰蓮)으로 장식된 상대석은 꽃잎을 중첩시켜 장식적 효과를 높였다. 이 불상은 조각솜씨가 정교하지 못해 생동감은 없지만, 신체의 묘사라든가 대좌의 구성 및 비례에서 9세기 초의 조형 감각이 보인다.

 

물걸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물걸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물걸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대좌

 

물걸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대좌

 

물걸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대좌

 

물걸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대좌

 

 

 

<2018. 6. 16>